본문 바로가기
Humanizing/Erich Fromm

자유와 민주주의 (에리히 프롬)

by 앎의나무 2006. 7. 21.

에리히 프롬 1983, “자유와 민주주의”, 김남석 역, 단음출판사 (Erich Fromm -)


창조성은 감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건만, 우리 사회는 감정 없이 생각하고 사는 것이 이상이 되어 있다.

한편 감정은 완전히 말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퍼스낼리티의 지성적 측면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결과 영화와 유행가는 감정에 굶주린 수백·수천만 소비자들을 즐겁게 하는 천하고 안이한 감상성에 빠져버린다.

특히 거론하고 싶은 금기가 된 감정은 - 퍼스낼리티의 근본인 비극에 깊은 영향을 비치는 - “비극감”이다. 죽음의 의식과 삶의 비극적 측면의 자각은 그것이 희미하든 뚜렷하든 인간 기본 성격의 하나이다.

어떤 문화이든 죽음의 문제와 대결하는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있다. ··· 지금은 단순히 죽음을 부정함으로써 삶의 근본적인 한 면을 부정했다. 죽음과 고통에 대한 자각이 가장 강렬한 삶의 의지에 대한 자극이 되고 인류에 대한 연대성의 기초가 되고, 환의나 정열이 격렬함과 깊이를 갖기 위해 불가결한 경험이 된다. 현대 사회는 이런 감정·경험을 억압한다. 이러한 비극감에 기초한 느낌은 인간에게 완전히 제거될 수 없으므로 현대인의 마음 속에서 부조리한 존재인 것처럼 남아 있다.

현대의 교육은 보다 많은 사실을 알면 알수록 진실한 지식에 도달한다는 가슴 아픈 미신을 신봉하고 있다. 흐트러지고 연결되지 않은 수백 가지 사실들이 학생들의 머리 속에 주입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 마치 매우 복잡하여 전문가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현대의 사회는 ‘생각하기’에 대한 회의주의와 시니시즘을 양산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은 혼자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유용한 지팡이일지는 모르나, 이러한 환상은 인간의 약점을 증가시키고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개인의 최대의 힘은 그의 퍼스낼리티의 최대한의 통합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것은 자기자신에 대한 최고도의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인간의 힘과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근본적 명령의 하나이다.

인간이 진실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 격렬한 활동은 흔히 그 활동을 스스로 결정했다는 증거가 되는 듯이 오해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의 소망이 어느 정도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 우리는 스스로 의욕하는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사이보그가 되었다.

개인은 남들이 그러헤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리라고 예상하는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유로운 개인’의 ‘순사한 안전의 기초’가 되어야 할 ‘자아’를 상실한다. 그 결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의혹이 생겨서 순응의 필요가 증가된다. (만일 내가 남들이 나라고 예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는 누구란 말인가?!)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고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에대한 회의가 가라앉고 일종의 안정감을 확득하겠지만, 그 대가는 너무 비싸다 ㅡ “자발성과 생명성”의 상실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익명의 권위에 순응하고 자기 것이 아닌 자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즐거운 듯한 표면적 위장의 배후에 숨어 있는 뿌리깊은 불행을 간과하는 것은 위험하다. 만일 제대로 살지 못하여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면 결국엔 그런 개인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 자유는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퍼스낼리티의 ‘자발적인’ 행위에 있다. 자발적인 행위는 고독이나 무력감에 쫓기는 강박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외부로부터 암시된 유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동인형의 행위도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연스럽게 “자유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다. 활동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적·지성적·감각적 경험이고 인간의 의지에서부터 출발하는 창조적 활동이다. 이러한 자발성의 한 전제는 퍼스낼리티의 전체를 받아들이고, 이성과 자연의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발적 활동은 인간이 자아의 완전성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고독의 공포를 극복하는 한 방법이다. 자아의 자발적 실현에 의해서 그 자신을 새로이 세계 - 인간·자연·자신에게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러한 자발성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이러한 사랑은 자아를 다른 상대를 통해 해소하는 것도 아니며, 상대를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개인의 자아를 확보한 다음에 자기를 고를 사람과 결합시키는 사랑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러한 양극성에 있다.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려는 욕구에서 발생하고 합일로 이끌어 가면서도 개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일도 그렇다 고독에서 도피하기 위한 강박관념 활동으로서의 일이 아니고, 자연을 예속하고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ㅡ 창조적 행위에서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일이다.

모든 자발적 행위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자아의 개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자아를 인간과 자연에 결합시킨다. 자유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분열 - 개성과 탄생과 고독의 아픔은 인간의 자발적 행위에 의해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해결된다. 모든 자발적 행위에서 개인은 세계를 품는다. 자아는 활동적일수록 강해진다.

만일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의 자기의 위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극복한다면, 만을 그가 자발적인 삶을 통해 세계에 대해 세계를 포함하는 관계를 갖는다면 그는 개인으로서 힘을 얻고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이 안정은 밖의 강한 힘에 의존하여 생기는 안정과 다르다. 이 안정은 동적인 것이다. 이 안정은 보호가 아니라 자발적 활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의 자발적 활동에 의해 순간순간 획득되는 안정이다.

정신건강에 해로운 것까지, 인류의 인간성의 발달에 해로운 것까지 상대주의로 인정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삶은 성장하고 발달하고, 인간은 여러 능력을 표현하려는 잠재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만일 삶이 방해받거나, 개인이 고독해지고 회의나 고독감이나 무력감에 사로잡히면 그때 그는 파괴성이나 권력 또는 복종에 의지하려는 충동에 압도된다. 만일 자유가 ‘-에로의 자유’로서 확립된다면, 만일 인간이 그의 자아를 타협없이도 확립할 수 있다면! (존엄, 품위, 용기, 친절, 위엄과 성실의 감각)


'Humanizing > Erich From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곡 없는 시각을 위해  (0) 2006.10.28
necessities to mastering art of living  (0) 2006.09.07
잊어버린 언어 #7  (0) 2006.07.21
잊어버린 언어 #6  (0) 2006.07.21
잊어버린 언어 #5  (0) 2006.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