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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uistics

형식이 기능을 제한하는 현상 - 장르형성의 일면

by 앎의나무 2010. 12. 7.
학위 논문을 쓰면서 한글 창제 이후의 언간(한글간찰)들을 시대순으로 살펴보았다.

언간이라는 장르는 한글의 존재를 전제하므로, 그 시기를 최고 15세기 후반으로 올릴 수 있다.

현재 발견된 가장 오래된 언간 자료는 이응태묘 출토 언간이나 순천김씨언간 등 16세기 중반의 자료들이다. 다음으로 17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집안 언간이 모여 있는 현풍곽씨 언간, 그리고 선조와 인조 시대의 왕실 언간 등을 주요한 대규모 언간 자료로 꼽을만하다.

자세한 국어학적인 내용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형식이 어떻게 기능을 가두고, 역기능(?)을 하게 되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처음, 한글이 창제된 직후의 한글 편지는 그 형식에서 자유분방하다.
순처김씨, 현풍곽씨 언간에 와서도 앞머리에 수신인, 끝에 발신인 정도가 들어가는 형식이 자리잡는 정도이다.

그런데 18세기로 넘어오면, 10줄로 된 편지글이라면 앞 4줄 뒤에 4줄은 수신인 또는 발신인, 틀에박힌 수사의 인삿말이고, 정작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2줄 정도이다. (비율로 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2줄도 언간의 독특한 문체로 실현된다.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본인의 입장에서 초기의 언간은 당시의 일상적 언어의 모습을 비교적 제대로 담고 있어서, 좋은 자료이지만, 후기의 언간은 언간이라는 형식의 장르가 언어의 변화를 왜곡시켰기 때문에, 그다지 달가운 자료가 되지 않는다.

또한 기능의 측면에서도, 정보의 전달과 수신이라는 본래의 기능은 이러한 형식적 악세사리로 인해 무척이나 제약을 받게 된 것이다. 한 언간의 80%를 차지하는 수사, 형식, 이런 걸 거둬 내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많이 전달하고 종이도 아낄 수 있었을텐데(당시에는 종이를 아끼기 위해 뒷면이나 외곽의 여백에도 글을 썼다) 하는 생각이 든다. 

장르도 일종의 관습이고, 원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관습의 본질이라고 해도,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