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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izing

[본문스크랩] 이찬훈의 현대인을 위한 노자강독

by 앎의나무 2007. 4. 24.

이찬훈의 현대인을 위한 노자강독

<1> 노자와 함께 여행하는 '오래된 미래'

<2> 행복에 이르는 길

<3> 상쟁(相爭)이 아닌 상생(相生)을 위하여

<4> 자립적 지역 자치주의의 꿈

<5> 억지로 하는 일은 오래갈 수 없다

<6> 노자의 반전평화 사상

<7> 약자를 보호하는 세상

<8> 자극적인 쾌락 추구는 사람을 망친다

<9> 패거리주의의 청산을 위하여
<10> 도는 낮은 곳에

<11> 패권주의에 반대함

<12> 자신을 돌아보라

<13> 지혜에 기초한 지식이어야 한다

<14>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다

<15> 비우고 또 비우라

<16>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안돼…

<17> 무지의 지

<18> 진실한 말과 화려한 말


<1> 노자와 함께 여행하는 '오래된 미래'


인간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생각의 실마리들

김홍도의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노자가 외뿔소를 타고 함곡관을 나서는 모습)'.
동양의 고전 중 '노자'만큼 널리 읽히고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진 책도 드물다. '노자'를 지은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오늘날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산재되어 있는 사료를 종합한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노자는 대략 기원전 570년에서 470년 사이에 살았던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 또는 노(老)씨,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중국 남방에 있던 초(楚)나라 상현(相縣)(또는 苦縣)에서 태어나 살다가 대략 30세 이후로는 패(沛)로 옮겼으며, 그 뒤에는 주나라에서 장서실 일을 보는 등의 벼슬을 하면서 20~30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주나라의 권력 투쟁 등으로 환멸을 느껴 다시 패로 갔다가 70세 경 은둔하기 전 '노자' 5천여 자를 남겼다. 진(秦)에 은거 후 100세 가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노자'는 두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편은 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도편'이고 다른 한 편은 덕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덕편'이다. 이것을 후대에는 경의 권위를 부여하여 흔히 '도덕경'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전해져 오는 '노자'에는 여러 판본이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판본은 하상공과 왕필이 주석을 붙인 '노자'이다.

'노자'는 2000여 년 전 이국의 한 늙은이가 쓴 케케묵은 낡은 책이다. 강산도 수백 번이나 바뀌었을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 그 낡아빠진 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회와 문명의 모습이 그때와는 천양지차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현대에 와서 '노자'는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노자'를 읽고 그로부터 많은 지혜를 얻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노자가 살았던 시기는 대략 중국의 춘추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그 시기는 약해진 주 왕조 아래서 여러 제후국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느라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지던 혼란의 시기였다. 그 시대 위정자들은 패권 다툼을 위해 백성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내몰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으며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억압하였다. 이런 가운데 재주 있는 자들은 제각기 자신의 재주를 뽐내며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한답시고 권력자의 편에 빌붙어 사리사욕만을 꾀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위해 서로 다투게 되니 인간의 삶이 각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자는 이러한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며 고민했던 철인이었다. 그는 혼돈과 폭력과 다툼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고심해 찾았던 사상가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류의 상황은 어떠한가? 과연 오늘날 우리 인류 사회는 억압과 착취, 다툼과 혼란, 그리고 고통이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되었는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면 결코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어쩌면 인류 사회는 노자가 해결하기를 그토록 갈망했던 문제와 고통들을 오히려 격화시켜 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제시한 '노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전으로서의 생명력을 갖는다. 우리는 '노자'에서 수많은 고통과 불행을 재생산하고 있는 현대문명과 삶의 양식을 극복할 수 있는 사유의 단초들을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도달하기를 꿈꾸는 미래의 모습은 이미 오랜 과거의 삶 속에 들어있었으므로 그것을 발굴해 되살려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노자'역시 우리의 '오래된 미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해설서들이 존재하고 있는 마당에 또 다시 단순하게 '노자'의 자구 해석을 반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의 노자 읽기는 오래된 노자의 가르침을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삶,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 인류가 나아갈 미래문명과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되살려내는, '오래된 미래'로 나아가는 여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 -국제.06.7/5 -
▲필자는 1960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부산대 철학과와 동대학원 졸업한 철학박사. 저서로 '둘이 아닌 세상'(이후· 2002), '불이사상으로 읽는 노자'(예문서원·2006) 등이 있다.

<2> 행복에 이르는 길


이웃과 삶의 기쁨 함께 나눌줄 알아야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고 하였다. 다른 것,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산이나 명예나 학식 같은 것들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를 통해 달성하려는 더 높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명예나 재산이나 학식을 얻으려고 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우리는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금방 깨닫게 된다. 그러나 행복에 대해서는 그런 질문 자체가 불가능하다. 무엇 때문에 행복하려고 하는가 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우스꽝스런 질문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그냥 행복하고자 할 뿐 무엇을 위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다른 것의 수단이 될 수 없는 최고의 목적인 것이다.

인생의 궁극목적이 행복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해답은 간단하다.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킬 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우리의 어떤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켜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게 하고, 그 배를 채운다(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노자' 3장)는 '노자'의 글 귀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모두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원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마음이 충족하기를 바라는 욕망에는 끝이 없다. 그런데 욕심 많은 마음이 원하는 것이 많을수록 그것을 모두 충족시키기는 어려워 행복과 멀어진다. 그렇다면 행복을 위해서는 오히려 욕망을 줄이는 편이 현명하다. 마음이 원하는 욕망들을 최소한으로 줄여 그것을 충족시키는 쪽이 행복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마음을 비게’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원하는 바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또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체이자 인간인 우리는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욕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기본적 욕구의 충족을 노자는 ‘배를 채운다’고 하였다.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연스런 최소한의 욕구만을 충족시키고, 인위적으로 조장되고 부풀려진 왜곡된 욕망을 비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 바로 노자의 가르침이다.

지금까지 인류 문명은 수많은 욕망을 부풀리고 새로 창출하면서 그것의 충족을 통해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끝없이 달려왔다. 경제체제를 비롯한 온 사회 영역이 그런 방향으로 발전해 왔으며, 인간들의 삶의 양식도 그런 방향으로 만들어져 왔다. 그러나 그러한 방향이 그다지 올바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 비해 엄청나게 부풀려진 다양한 욕망을 발전한 물질문명을 통해 충족시킬 수 있게 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옛날보다도 더 심한 불안과 스트레스, 삶의 무의미함과 공허감에 시달리면서 불행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려야 한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물질적 성장과 풍요를 통한 무한정한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최소한의 욕구 충족으로 만족할 줄 아는 쪽으로의 방향 전환이다. 노자의 얘기처럼 소박함과 검소함 속에서 자족하면서 이웃과 삶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아는 것이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물질적 부의 성장과 확대만을 지상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우리의 사회체제와 삶의 양식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만 한다.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 국제.06.7/12 -

<3> 상쟁(相爭)이 아닌 상생(相生)을 위하여


행복한 터전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가는 길

노자 초상화.
'뛰어난 것을 떠받들지 않아 백성으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고, 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 백성으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지 않게 하라(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노자' 3장)는 노자의 말처럼 세속의 이상과 어긋나는 얘기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세속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남보다 출세하고 남보다 잘 사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남들과의 경쟁에서 싸워 이기는 것, 이겨서 일등이 되는 것이야말로 대다수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뛰어남을 이뤄 경쟁에서 이겨 일등을 차지한다면, 오늘날 가장 귀한 재화라고 할 수 있을 돈이 따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서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뛰어남을 숭상한다. 그런데도 이와 정반대로 얘기하는 노자의 말은 한참이나 이상한 소리로 들린다.

얼마 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월드컵 경기를 보라. 사람들은 자기나라 '전사'들이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상대방을 이기고 승리를 거두면 열광하고, 패하면 울분과 슬픔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4000만이 하나 되어 밤잠을 설쳐가며 목이 터져라 태극전사들의 승리를 외쳐댔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바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뛰어남과 경쟁에서의 승리. 그리고 그를 통해 얻는 이익을 이상으로 삼고 찬양하는 것이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점이다.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을 살벌한 전쟁터로 만들어 우리 삶을 불안하고 각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축구만 해도 그렇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프로축구 경기는 놀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쟁이다. 오직 승리만을 지향하는 프로 축구의 세계에서 경기장은 전쟁터며, 선수들은 전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기서 그야말로 사활을 건 전투를 수행한다. 피가 튀고, 발목이 부러지고, 코뼈가 주저앉으면서도 그들은 오직 승리만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한다. 거기에는 이미 서로를 위하며 함께 즐기는 페어플레이와 놀이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한데 어울려 즐겁게 공을 차며 즐기는 놀이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상대방을 교묘하게 가격하고 태클을 걸어 넘어뜨려서라도 승리를 거두려는 살벌한 전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전쟁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심지어 태클을 걸어 상대방을 잘 넘어뜨려 승리에 공헌하는 선수를 뛰어난 전사로 칭송하기까지 한다.

이런 전쟁이 스포츠에만 한정된다면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한경쟁에서 싸워 이겨야만 한다는 전쟁의 논리와 가치는 결코 여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생활 영역에서 무한경쟁을 벌여 뛰어남을 발휘해 승리를 쟁취할 것을 강요받으며, 또한 스스로도 그러한 논리와 가치를 내면화해 재생산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쟁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만이 살아남고 성공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뛰어나지 못해 경쟁에 패배한 사람은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논리가 지배하는 한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불안정하고 피폐해 질 수밖에 없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뛰어남을 숭상해 경쟁력 있는 사람들을 길러야 그런 사람들 덕분에 사회가 발전한다고. 그러나 그렇게 해서 소위 발전했다는 사회는 바로 그 때문에 이전보다도 더욱 강화된 경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살벌한 전쟁터일 것이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스포츠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을 인간답고 행복한 터전으로 만드는 것은 뛰어남을 숭상하고 승리만을 추구하는 상쟁이 아니라 못난 것도 격려하고 도와주며 함께 어우러져 나아가는 상생의 길뿐임을 노자는 말하고 있다.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 - 국제.06.7/19 -

<4> 자립적 지역 자치주의의 꿈


이웃을 돕고 사랑하며 살아라

노자는 자립·자족하는 지역 자치주의를 갈구했다. 사진은 지난 14일 오전 장충체육관 앞에서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회원들이 FTA가 적힌 상자를 밟는 퍼포먼스 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용우 기자
목하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의제라면 무엇보다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꼽을 수 있다. 향후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엄청난 변화와 파장을 몰고 올 이 사안을 둘러싸고 적극적인 추진론자와 반대론자 사이의 논쟁이 뜨겁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적극적인 추진론자들은 소위 세계화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세계화주의자들은 오늘날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고립된 폐쇄적 지역주의에서 탈피해 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생활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이 보기에는 제 지역에서 나고 만들어 내는 것들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제 지역에 뿌리박고 일하면서, 제 지역에 머무른 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갑갑한 지역주의이자 고립주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인간 삶의 가장 기본인 의식주 문제도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각 지역마다 경쟁력 있는 일부 분야만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나머지는 세계 여러 곳으로부터 싼 값으로 사들여 해결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논리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더불어 발달해 온 자유시장이라는 이념의 연장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시장이라는 제국의 영토를 확장해 온 역사였다. 엄청난 생산력으로 넘치는 상품을 쏟아내는 자본주의는 전지구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시장으로 끌어들인다. 자본의 침투는 전 지구의 어떤 구석도, 인간 삶의 어떤 부분도 상품의 생산과 교환이라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벗어나는 자율적 영역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세계화주의자들은 이런 자본의 논리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며 전 세계와 삶의 모든 영역을 자유로운 경쟁에 따르는 시장의 논리와 법칙에 맡기는 것이야말로 지속적인 발전과 풍요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자본주의의 그러한 세계화 추세가 전 세계 인류를 더 행복하게 해 주는 바람직한 발전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존재한다. 더구나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 맺는 자유무역협정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나라가 과연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내고 지속적인 발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노자는 일찍이 경제 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세계통합적인 이념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과 개 울음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가지를 않는다(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노자' 80장)고 한 그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세계의 모든 지역과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을 세계 시장이라는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자본주의의 세계화 경향과는 반대로, 자립적인 지역 자치주의를 이상으로 그리는 노자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이를테면 '비교우위'에 입각한 전 세계적 분업체제는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지역 주민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지역적 자치공동체를 파괴한다. 그것은 각 지역을 서로 어울려 협동하여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가 아니라 전 세계적 분업 체계 속에 있는 하나의 하청공장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각 지역을 자립적인 것이 아니라 극히 외부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또한 세계화라는 것은 지역공동체를 파괴할 뿐 아니라 사실은 엄청난 에너지의 낭비를 초래함으로써 지구 생태계 전체에도 치명적인 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런데 노자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자립적 지역 자치주의를 주장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노자의 사상 속에서 행복한 인간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이 속한 땅에 대해 애정을 갖고 그곳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어우러져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노자가 그렸던 자족하는 자립적 지역 자치주의의 꿈은 오늘날 이 땅에서 정녕 실현할 수 없는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 - 국제.06.7/26 -

<5> 억지로 하는 일은 오래갈 수 없다


무한경쟁 사회가 부도덕적 관행 낳아 /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중국 복건성 청원산에 세워져 있는 노자 석상.
'노자'에 보면 발꿈치를 들고 서면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랑이를 한껏 벌려 걸으면 오래 갈 수 없다(企者不立, 跨者不行)"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자연스런 도리를 벗어나 억지로 하는 일은 결코 오래갈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제 키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할 때나, 아니면 제 키보다 더 커 보이려고 할 때, 우리는 발꿈치를 들고 까치발을 선다. 어느 경우든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고 억지로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 또한 우리는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거나 남보다 더 빨리 가려는 욕심에 가랑이를 힘껏 벌려 급하게 걷는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걸으면 처음에는 빠른 것처럼 보여도 곧 지쳐서 결국은 목적지에도 이르지 못하고 낙오하거나, 아니면 남들보다도 오히려 한참을 뒤처지게 된다.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은 나와 내 것에 집착하기 쉬우며, 이러한 경향은 타인과의 무한경쟁 속에서 남과 싸워 이기고 승리를 쟁취하려는 경쟁과 승리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더욱 강화된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을 꾸미고 포장하며, 자신의 실적을 부풀려서 남들의 눈을 현혹시켜 자신을 높이고 성공을 거두려 한다.

그러나 진실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바깥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아무리 발꿈치를 들고서는 오래 서 있을 수 없으며, 가랑이를 너무 벌리고 걸어서는 오래 갈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요즈음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같은 내용의 논문을 제목만 바꿔 두 개의 실적으로 거짓 보고하여 연구비를 수령하고, 같은 논문을 서로 다른 논문집에 중복 게재하여 실적을 부풀렸다는 것 등이 문제가 되어 퇴진 공방이 점점 더 가열되고 있다. 야당과 시민·교육 단체는 물론 여당 내에서도 교육부총리가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형성해 가는 가운데, 김 부총리와 청와대는 사퇴론을 일축하며 버티고 있다. 최근에도 우리는 몇몇 장관들의 심각한 잘못이 드러나 퇴진 압력을 받고도 버티다가 끝내 어쩔 수 없이 사퇴하고 만 사례를 몇 차례나 경험한 바 있다. 이는 아직도 우리나라 정치권의 도덕적 수준이 국민들이 요구하는 수준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국민들은 더 이상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준엄한 현실을 보여준 실례이다.

우선 어떻게 해서든 이곳저곳에서 제공하는 각종 연구비를 타 내고 이미 발표한 논문을 새로운 연구실적으로 거짓 보고한다거나, 교수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같거나 유사한 논문을 여러 곳에 중복 게재하는 등의 행위를 일부 교수들이 행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럽게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이는 무분별한 무한경쟁을 부추기면서 외적인 실적 쌓기만을 강요하는 사회체제와 교육현실이 낳은 왜곡된 대학사회의 모습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부도덕한 행위를 일종의 관행과 같은 것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그러한 잘못을 저지른 개인이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진리 탐구와 참교육과는 거리가 먼 실적 쌓기를 통한 경쟁만을 강요하는 교육체제가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 해도 그에 영합해 거짓으로 포장된 성과를 통해 개인의 이득을 도모한다는 것은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그러한 잘못된 행위를 감독·시정하고 왜곡된 교육현실을 바로잡아야 할 일차적인 책임은 교육부에 있으며, 교육부총리는 바로 그 기관의 수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부총리는 일개 대학 교수에게 요구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한 도덕적 책임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당사자가 연구자와 교육자로서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면 마땅히 엄중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의혹이 있다면 명명백백하게 잘잘못을 가려야 하겠지만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려 한다면, 그것은 발꿈치를 들고 오래 서 있으려 하거나 가랑이를 한껏 벌려 걷는 것처럼 무리한 일로서 결코 오래갈 수 없을 것이다.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 - 국제.06.8/2 -

<6> 노자의 반전평화 사상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의 뜻 얻을 수 없어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노자 백서(帛書)가 발굴된 중국 후난성 장사시 마왕퇴 한묘의 전경.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죄 없는 수많은 레바논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자국 병사 2명을 납치했다는 구실로 벌인 이번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이미 거의 천 명 가까운 레바논 시민들이 죽고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정치적 지원을 통해 중동지역에서 많은 이득을 얻어 온 미국을 제외한 지구상의 대다수 민중들이 반대하는 야만적인 이번 전쟁은 아직도 쉽게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경쟁과 승리, 정복과 지배의 역사였으며, 그를 위한 군비 경쟁과 전쟁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노자가 살았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러 제후국으로 갈라져 있었던 그 당시 각 나라의 위정자들은 소위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무고한 백성들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런 참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노자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반전평화 사상을 부르짖었다. 노자는 모든 군대와 무기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해치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므로 되도록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약 나라가 위난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쓸 수밖에 없다면, 나라를 구하는 것에 그쳐야지 그걸 기화로 남을 정복해서 영토를 확장하고 그들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남의 침략을 받아 나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최소한의 방어를 벗어난 일체의 전쟁 행위에 대해 노자는 이렇게 일갈하였다. "이기는 일이 좋은 일이 아니건만, 그것을 좋아하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 뜻을 얻을 수 없다.…전쟁에 승리하면 상례로 대해야 한다(勝而不美,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得志於天下矣. …戰勝. 以喪禮處之).”

노자가 분명히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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