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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uistics

[본문스크랩] 토포스(topos)

by 앎의나무 2007. 2. 9.

토포스(topos), 이것은 원래 논거를 발견하기 위한 장소를 뜻하는 개념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장소 개념이 아니라 '말과 관계된 밑자리, 즉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데 쓰이는 말들의 터전'인 것이다. 어떤 논의를 할 때 그 논의에 필요한 논거들의 장소를 잘 알고 있다면 그 논의를 더 완벽하게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런 논거들의 창고가 바로 토포스인 것이다.

애초에 논거들의 장소로 이해되던 그 개념은 후대로 오면서 구체적으로 '후속 텍스트들의 창작을 위한 원천으로서 자주 사용되는 한 텍스트에서의 관습화된 표현이나 구절'을 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토포스는 중세의 수사학 교육의 파급과 더불어 급속도로 전파되기에 이른다. 쿠르티우스는 이를 '확립된 사고 체계, 확장된 은유, 묘사의 표준화된 구절 그리고 호머에서 현대까지, 특히 라틴 중세와 르네상스기에 서구 유럽 문학에 반복되는 것들'로 더욱 구체적으로 정의하며, 그것들이 '문학에 의하여 다루어지고 형체가 주어지는 모든 생활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토포스에는 시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뮤즈에 대한 기원이나 낙원(에덴) 묘사 등이 이에 속한다. 자연스럽게도 중세의 그런 수사학 교육에 힘입어 이런 토포스는 하나의 문화적 전통으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토포스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먼저 부정적인 의미에서 볼 때,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표현의 문제에만 매달리게 되면 토포스는 새로운 논증을 발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지 않고 그저 사용되기 위해 기억되며, 어떤 요구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발생 후에 암송되는 것이 고작이다. 그 결과 여러 상황에 써먹을 수 있는 표현들을 단순하게 수집해 놓은 아포리즘과 운문들의 말터 모음집(commonplace book)이 유행하게 되는 부정적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맥켄이 소제목으로 내세운 [창조성과 말터]라는 것도 바로 이런 부정적인 토포스의 한 측면을 비판적으로 다룬 것이다.

이와 같은 상투적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는 토포스는 상투성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줄 수 있다. 즉 토포스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기에 보편적 진리가 될 수도 있으며, 보편적인 만큼 위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시의 문제를 다룬 베일리는 위대한 시인일수록 그런 상투적인 토포스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관점에 설 때 토포스는 상투성의 차원보다는 보편성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쿠르티우스가 이 토포스(토픽)를 가장 일반적인 종류의 관념들(ideas of the most general sort)을 발견할 수 있는 창고로 본 것은 바로 이 보편성의 측면에 대한 지적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