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상인 : 친구들, 당신들은 어디서 오셨소?
고려상인 : 우리는 고려 왕경에서 왔습니다.
중국상인 : 이제 어디로 가시는가?
고려상인 : 우리는 대도(大都)로 갑니다.
그 이름도 야릇한 「노걸대」(老乞大)라는 중국어 회화학습서의 첫 대목이다.
제목의 뜻을 종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 「박통사」(朴通事)와 더불어 「노걸 대」는 고려 및 조선왕조에서 중국어 전문 통역관(당시는 대체로 이런 사람을 역관 譯官이라 불렀다) 양성을 위해 편찬한 회화책 중 하나이다.
물론 다른 책도 있었겠으나, 고려 이후 조선왕조 멸망 무렵까지 중국어 학습교 재로서 판본을 거듭하며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 회화책이 「노걸대」였다.
1998년 12월14일. 중국과 대만, 일본 등지의 해외 중국학 관련 학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났다. 고려시대의 상황을 담고 있는, 「노걸대」 원본에 해 당하는 판본이 발굴,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노걸대」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성종 14년(1483)에 기존 「노걸대」를 대폭 줄이고 고친 이른바 '산개(刪改)' 「노걸대」였으며, 가장 널리 알려지고 통용된 것으로는 중종 10년(1515년) 무렵 중국어 역관 최세진(崔世珍)이 한글 번역을 붙여 발행한 「번역(飜譯) 노걸대」가 있다.
그런데 이들보다 시대적 배경이 훨씬 빠른 고려시대로 설정된 판본인 '원본' 「 노걸대」가 한국에서 발견됐던 것이다.
이 책은 실명을 알 수 없는 고려 상인이 사촌형제 둘과 함께 고려 특산품인 말 과 인삼, 모시, 삼베 등을 연경에 갖다 팔고, 다시 고려에서 팔 물건을 사서 돌아오 는 여러 상황을 당시 중국어 구어체로 기록하고 있다. 대화는 고려 상인들과 그들의 연행길에 동행한 중국 상인이 주고받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이 「노걸대」가 지닌 가치는 실로 다대하지만, 무엇보다 당시 '살아있는 중국 어'의 실상을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전하는 자료가 없다는 점이 꼽힌다.
「노걸대」는 이와 함께 고려 및 조선의 통역관 양성체제와 그 실상을 엿보게 하고 당시 습속을 드러내며, 또 조선과 중국간 무역의 실상도 알려준다.
중국 여관에서 숙박비를 에누리하자, 못하겠다 옥신각신하기도 하고, 중국에서 싼 값에 구입한 물품을 고려로 가져가 폭리를 취하려는 모습도 관찰된다.
방탕한 생활 끝에 패가망신한 사람의 이야기를 곁들임으로써 교훈성을 높이고 있으며, 원대에 통용되던 '보초'라는 지폐 사용법도 나온다. 또 고려 상인이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묘사한 여행안내서이기도 하다.
이 '원본' 「노걸대」가 발굴 6년만에 발굴자 가운데 한 명인 고려대 국어국문 학과 정광(64) 교수에 의해 완역돼 나왔다. 체제는 각 절마다 현대 한국어 번역을 붙인 다음, 원문과 조선시대 번역본을 배치했으며 풍부한 설명도 곁들였다.
신간 광고문구는 다소 과장돼 있다. 그러나 띠지를 장식한 "순회화체 원대(元代) 세계유일 문헌! 중국, 일본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세기의 발견!"이란 문구는 결코 허 세가 아니다. 김영사刊. 532쪽. 3만4천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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