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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zing/Erich Fromm

네이버 캐스트 / 에리히프롬

by 앎의나무 2009. 4. 29.
원문 :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31 



에리히 프롬은 1900년 3월 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과실주 상점을 운영하면서도 랍비처럼 살았지만, 유대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은 약간 흐릿하다. 프롬 자신이 ‘지적 자서전’으로 1962년에 쓴 <환상의 연쇄를 넘어: 나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의 만남>에서도 선조나 유대교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프롬은 1930년대의 10년 동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산실인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일원이었으나, 연구소의 다른 구성원과는 그다지 사이가 안 좋았다. 특히 아도르노와는 서로 앙숙이었다. 그런 가운데 프롬은 연구소 기관지 <사회연구> 창간호(1932)에 발표한 논문 ‘분석적 사회심리학의 방법과 과제’를 통해 인간의 정신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와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통합하는 새로운 사회심리학을 열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종합을 꾀한 사회심리학 연구의 계보를 프롬 자신은 이렇게 보았다. “정신분석학적이면서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으로 저술한 대표적 학자는 빌헬름 라이히인데, 그의 이론과 나의 이론은 공통점이 거의 없다. 사르트르와 비교해 본다면,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 정향(定向)의 휴머니즘적 입장에 서서 분석했지만, 임상경험이 거의 없고 용어구사는 현란하되 심리학을 피상적으로 다룬 결함을 보인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프롬은 탄압을 피해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미국 망명 연도가 1934년이라는 문헌도 있다). 같은 해 나치가 문을 닫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을 재개하지만, 프롬은 1939년 연구원직에서 물러난다. 1950년 프롬은 두 번째 아내 헤니 굴란트의 건강회복을 위해 멕시코로 거처를 옮긴다. 그런 정성을 기울여도 헤니는 끝내 건강을 되찾지 못한다. 뒤늦게 만난 ‘천생연분’ 애니스 프리먼과 프롬은 두 사람 모두 지난날의 불행을 뒤로 하고 평온한 결혼생활을 ‘누린다.’ 프롬과 애니스는 1970년 무렵까지는 멕시코와 미국을 오가며, 1973년 봄까지는 스위스와 멕시코를 오가며 살다가 1973년 여름 스위스에 정착해 말년을 보낸다. 프롬은 1980년 3월 18일 스위스 티치노(Ticino)주 로카르노(Locarno)군 무랄토(Muralto)시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1972년 9월 1일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라이너 풍크는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프롬을 처음 만난다. 스물아홉의 청년 풍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양’과 ‘생각할 줄 아는 힘’이라는 결론을 내린 즈음이었다. 하지만 풍크는 프롬이 자신의 앞날을 이끌어 주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프롬의 아파트 현관 초인종을 누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프롬은 한 달 전 직접 찾아가 그에게 한 수 배우겠다는 편지를 보낸 청년을 이리저리 살핀다. 너를 내 저작권 관리자로 점 찍었다는 듯이. 이 ‘직접적인 만남’에서 프롬이 부둥켜안으려 한 것은 풍크의 ‘핏빛 심장’이었다. ‘핏빛 심장’은 풍크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 그의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의 가치관 뒤에 숨은 영혼의 비밀을 말한다. 프롬은 풍크가 지닌 합리적인 태도, 비합리적인 고집, 숨어있는 충동 같은 것을 파악하고자 눈길을 맞췄다. 두 사람의 대화는 프롬의 해박한 지식 덕분에 늘 활기가 넘쳤다. 프롬과 함께 있는 시간은 풍크에게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데 스승에 관한 제자의 다음과 같은 회고가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숨을 거두기 2주 전인 1980년 3월 18일, 프롬은 닷새 앞으로 다가온 80회 생일을 기념해 티치노의 한 방송에 출현해서 귀도 페라리와 대담을 나눴다. 페라리는 프롬에게 인생을 살며 겪은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 꼽는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프롬은 자신의 인생을 뒤흔든 사건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들었다.”(<내가 에리히 프롬에게 배운 것들>에서) 프롬이 세상을 떠난 날은 1980년 3월 18일로 알려져 있다. 만에 하나, 스승이 타계한 날짜에 대한 기억이 잘못됐더라도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1980년 3월 18일은 만년의 프롬에게 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프롬은 대담을 진행한 스위스 방송인의 질문을 받고 열여섯 살부터 자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번민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찌해서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그토록 말도 안 되는 짓을 서슴지 않으며, 어쩜 그렇게도 쉽사리 유혹에 빠지는 것일까요?”


프롬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다. <사랑의 기술>(1956)은 적어도 34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부가 팔렸다. 프롬의 글은 그가 지닌 직접적인 만남의 능력에서 출발한 까닭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는 게 ‘애제자’ 풍크의 분석이다. <사랑의 기술>은 사랑이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기보다는 하나의 ‘기술’이라는 견해를 전제로 한다. 하여 사랑을 잘 하기 위해선 사랑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고 이에 걸맞은 훈련을 해야 한다. 사랑은 ‘창조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술을 익히지 못한 사람의 사랑은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1976)에 의하면 소유적 실존 양식은 현대 문명의 재앙을 대표한다. 존재적 실존양식은 충만한 삶의 가능성을 대표한다. “존재적 실존 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있다.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있다. 소유적 실존양식의 인간은 그가 과거에 축적한 것-돈, 땅, 명성, 사회적 신분, 지식, 자식, 기억 등-에 묶여 있다.” 이에 맞서 독자성, 자유, 비판적 이성은 존재적 실존양식을 위한 전제가 된다. 지식의 영역에서 존재양식의 가장 높은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양식의 가장 높은 목표는 좀 더 많이 아는 것이라고 한다.


프롬의 저서 가운데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또한 주목할 만하다. 프롬은 이 책에서 사회적인 과정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심리적 요소의 기능을 강조한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동적이라는 가정 아래, 각 개인과 세계와의 관련성을 분석하기도 한다. 그는 근대인에 대한 자유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중세 말엽으로 거슬러 오른다. 중세사회에는 개인적 자유가 없었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사람들은 최초의 개인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개인적인 자유를 얻게 되면서 동요, 무력감, 회의, 고독, 불안을 함께 떠안는다. 근대에 와서 자유는 인간에게 독립과 합리성을 부여하는 한편, 고립시킴으로써 그를 불안에 싸인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고립은 견디기 어렵다. 따라서 근대인은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의존과 복종의 대상을 찾느냐, 아니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성에서 나오는 적극적인 자유의 실현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프롬 탄생 100주년을 기려 출간된 <에리히 프롬과 현대성>(영림카디널, 2003)에 실린 독일 언론인 라이너 오테의 글은 경제의 세계화와 세계 경제윤리의 생성이라는 차원에서 프롬의 철학을 재조명한다. 오테는 프롬이 남긴 메시지에서 세계 경제윤리와 관련하여 프롬이 지닌 의미를 되새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의 물리적 생존이 인간의 극단적인 정신적 변화에 의존하고 있다.” 오테는 프롬의 인터뷰 인용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스스로 완전히 타인이었던 사람만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타인이 된다는 것은 전 세계가 내 집이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라이너 풍크가 프롬의 현대적 의미를 돌아본 글 역시 프롬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끝맺는다. “가장 정상적인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병들어 있는 사람들은 가장 건강한 사람들이다. 말장난이나 지나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말을 진지하게 하고 있으며 재미있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1965년 프롬은 <사회주의 인간론>을 엮어 펴낸다. 우리말로도 옮겨진 이 책(사계절, 1982)은 현대 휴머니즘 운동을 다룬다. 프롬을 포함한 공저자 30여 명은 주로 동구권 출신 학자다. 이들은 휴머니즘을 내세워 스탈린을 비판했다. 서문에서 프롬은 휴머니즘을 “인류의 통합에 대한 믿음이며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아를 완성하는 인간의 잠재력”이라 규정한다. 또한 휴머니스트는 인간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믿음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 여부는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면 사회주의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프롬에게 그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휴머니즘이나 마찬가지다. 이론과 실천, 지식과 행동, 정신적 목적과 사회제도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상은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휴머니즘이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