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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zing/Erich Fromm

사랑의 능력에 필요한 것 #2

by 앎의나무 2008. 10. 27.

사랑의 능력은 자아도취와 또한 어머니나 가족에 대한 근친상간적 애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 달려 있다. 사랑의 능력은 성장하는ㅡ세계와 나에 대한 관계에서 생산적인 지향을 전개시키는 능력 달려 있다. 탈피, 탄생, 각성의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 조건으로서 한 가지 성질 곧 '믿음, 신앙'[각주:1]'을 요구한다.

신앙은 합리적 신앙과 비합리적 신앙이 있다. 비합리적 신앙은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바탕으로 하는 어떤 사람 또는 관념에 대한 믿음이다. 합리적 신앙은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신이다. 원래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과학의 역사는 이성과 진리의 비전에 대한 신앙의 예로 가득차 있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자기 자신의 사고력, 판단력에 대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비합리적 신앙은 오직 어떤 권위자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와 같이 말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만, 합리적 믿음은 대다수 사람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생산적 관찰과 사고에 기초를 둔 독립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사고와 판단 외에도 인간관계에서 합리적 신앙을 경험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본적 태도의 불변성, 그 사람의 퍼스낼리티의 핵심의 불변성, 그의 사랑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어떤 사람이 의견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 동기가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신앙을 갖고 있다. 존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환경과 의견과 감정의 변화와 관계없이 생애를 통해 지속되는 자아 즉 우리의 퍼스낼리티의 핵심의 존재를 알고 있다. '나'라는 말의 배후에 있는 실재는 바로 이러한 핵심이며 우리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확신은 이러한 실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만약 자아의 지속성에 대해 신앙에 가까운 믿음을 갖지 못하면 동일성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을 위협받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며 다른 사람의 수긍이 동일성에 대한 우리의 감정의 기초가 되어 버린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미래에 있어서도 오늘과 같을 것이며, 지금 기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느끼고 행동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앙은 약솔할 줄 아는 능력의 조건이고, 니체가 발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므로, (자신에 대한) 신앙과 믿음은 인간의 실존의 한 조건이다. 사랑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그 신뢰성에 대한 신앙이다.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경우의 또 한 가지 의미는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믿어 주는 것이다. 어린애들에 대한 교육은 어린애들이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에 바탕해야 한다. 이는 인류에 대한 믿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적절한 조건만 주어지면 어린애들에서와 같이 모든 인간에게는 평등, 정의 사랑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질서를 수립할 가능성이 있다.

비합리적 신앙은 압도적으로 강하고 전지전능하다고 느껴지는 힘에 굴복하고 자기 자신의 능력과 힘을 포기하는 데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합리적 신앙은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합리적 신앙은 우리 자신의 관찰과 사고의 소산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의 성장, 자기 자신의 성장이라는 현실, 우리 자신의 이성과 사랑의 능력의 힘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인류에 대해 신앙을 갖게 된다.

합리적 신앙의 기반은 '생산성'이지만, 비합리적 신앙은 현존하는 힘을 믿는 것이므로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성장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성장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비합리적 신앙은 매우 불합리하고 중대한 오산을 한 것이다. 권력에는 합리적 신앙이 없다.권력에 대한 굴복, 또는 권력으르 갖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소망이 있을 뿐이다. 신앙과 권력은 상호배타적이나, 종교가 권력에 의지하거나 결탁할 때 부패하고 마침내 이러한 종교나 정치체제가 갖고 있던 힘을 상실한다.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도 받아들이려는 용의가 필요하다. 생활의 일차적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주장하는 자는 누구든지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는 용기, 곧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고 거기로 도약하고 모든 것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때의 용기는 허무주의적이고 삶에 대한 파괴적 태도의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용기라는 이름을 쓴 절망일 뿐이다.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기 위해, 곤란과 좌절과 슬픔을 우리들에게 일어나서는 안 될 부당한 처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극복해야 할 도전으로 받아들이려면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신앙과 용기의 훈련은 어디서 언제 신앙을 상실하는가에 주목하고, 신앙의 상실을 은폐하는 데 이용되는 합리화를 간파하고, 어디서 우리가 비겁한 태도로 행동하는가, 또한 어떻게 비겁한 행동을 합리화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배반하는 경우 언제나 약해지며, 약해지면 점점 더 새로운 배반을 하게 되고,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또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도, 비록 대체로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사랑하는 데 대한 공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거의 갖지 못한 자는 거의 사랑하지 못한다. 어린애가 걸음마를 배우듯, 신앙을 갖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

활동은 자신의 힘의 생산적 이용을 나타낸다. 사랑은 활동이다.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 있다. 각성상태는 게으름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루 종일 자신의 눈과 귀로 느끼고 사고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기술의 실용에 불가결한 조건이다. 생산성은 사랑의 영역과 그밖의 영역에서 분리되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분야에서 비생산적이라면 사랑에 있어서도 생산적일 수 없다. 생산성은 분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의 능력은 집중(intensity), 각성(awakeness), 고양된 생명력을 요구하는데, 이들은 삶의 다양한 부문에서 생산적이고 활동적 정향의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사회적 존재와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사회가 조직되어야 한다


  1. 원서에는 faith인데 보통 신념으로 번역되는 어휘이다.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의 번역술어인 '신앙'을 그대로 취하기로 한다. Hesse의 "Demian"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귀절이 나온다. 즉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건내려고 작성한 쪽지를 결국 보내지 않게 되는데, 그때 싱클레어는 되뇌인다. '나는 기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이 귀절의 '기도'와 여기서의 '신앙'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닌, 인본적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성장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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