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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zing

10년

by 앎의나무 2008. 3. 13.
 1997년도, 대학이라는 곳엘 들어왔다. 우여곡절 끝에 과는 국어국문학과... 지금 생각해보면 수능을 망치고선 될대로 되라는 심정의, 참 자기파괴적 성격이 발동하여 선택한 과이지만, 그런 병도 넉넉히 안아 주고 보듬어 준 멋있는 전공이다.
 
 난생 처음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되어 사실 많이 집이 그리웠고 가족이 그리웠다. 더욱, 지금까지도 서울은 언제나 목이 아프고 콧물이 나게 하는 지저분한 공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서울은 매력이 있다. 언제나 활기에 차 있었고, 사람들은 분주하다.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서울의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 꿈이 적절한지는 논외로 하고...
 
 동기라는 이름으로 각지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다양한 삶의 방식들과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같이 웃고 같이 울었다. 그것은 즐겁고 유쾌한 경험이다. 또한 누구에게나 젊음은, 그 외양, 환경, 성격에 관계없이, 젊음이라는 그 생기넘치는 자격만으로, 한 번쯤은 연애에 빠지게도 하고 한 번쯤은 자신만의 세계에 젖어 들게 한다는 걸 나도 알았다.
 
 대학의 강의는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들을 가르친다. 선배들과 선생님들과의 대화는 신비함으로 가득하다. 특히 책들에는 많은 스승들이 숨어 있었던 것 같다. 점점 많은 걸 알아가는 가운데서 내가 아는 것들은 천천히 때로는 과격하게 뭉게져갔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철학들은 그냥 '알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것의 '현실'은 전혀 감도 못잡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무서웠다. 내가 알고 있고 정의라고 믿었던 가치들이 서서히 무너져 가는 걸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자신을 위한 합리화는 정말 스스로도 진저리 칠 정도로 치밀하고 기민하게 이뤄졌다.
 
 '그래 어짜피 사회가 이래-', '다들 그러는데 뭘-', '전세계적인 요구에 맞춰야돼-', '부모님이 바라시잖아', '아무도 그런 걸로 나를 비난할 자격은 없어', '세상은 어짜피 권력과 돈으로 돌아간다'
 
 '중요한 것은 세계적 추세가 아니라 지구에서 인류 전체가 지속적으로 행복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어느 경제학자의 언급이나, '사회적 편견을 꿰 뚫어 볼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언급이나, '헛된 격정과 욕망에서 벗어나라'는 어느 심리학자의 글이나, '석유 자원의 남용과 온난화'에 대한 어느 과학자의 언급이나,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어느 문학자의 글에 밑줄을 쫙쫙 그으며 감동하며 동감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런 합리화가 무수히도 이뤄졌다. 애초에 이런 걸 몰랐으면 모를까, 나의 마음은 서서히 그렇게 굳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저 그렇게 살다가 군대를 가고 그저 그렇게 복학을 했다. 그런데 변화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수업 때문에 읽었던 여러 교양서적들이 그때 새로운 내용으로 둥실둥실 떠올랐던 것이다.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 거냐고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좋아하고 재밌게 들었던 전공 분야를 공부하자고 결심을 했다. 복학하고 들은 첫 수업의 교재인 'the speech chain'을 도서관 열람실 책상에 딱- 펼치고 공부를 시작할 때의 당황스러움이 기억에 남는다. 그 책상에 앉은 8명 중에 유일하게 나만이 전공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한 반은 영어공부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도 사시와 회계사 시험을 공부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주변엔 온통 영어/국가시험 책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지금은 피식 웃고 말지만, 그것 때문에 일 주일은 고민했던 걸로 기억한다.
 
진정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최소한 말초적 쾌락만은 아니더라는 것, 최소한 경제적 풍요만은 아니더라는 것, 최소한 무기력하게 유아기적 구원에 대한 未望에 모든 걸 내맡기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 사람에 대한 믿음삶에 대한 용기는 필요하다는 것이 작은 결론이다.
 
 스물에 뿌린 씨앗이 10년 만에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었나보다고 잠시 자만을 해보기도 하지만 역시나 삶은 계속 진행 중인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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