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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uistics/Bybee

구조의 창발

by 앎의나무 2008. 3. 4.

어떤 시점에서나 어떤 언어에는 내적구조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내적구조는 개개의 인간이 계획해 온 바가 아니다.


아래의 어느 포스트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언어는 시간에 따라 생노병사의 한살이를 갖는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다. 언어를 유기체인 양 보는 것은 언어가 보이는 어떤 현상들이 생명체의 한살이와 유사한 면이 보이기 때문일 뿐이다.


또한 그렇다고 언어가 인간이 의자나 책상을 만들 듯이 계획적으로 어떤 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명태조, 세종, 북한의 언어 개혁 등을 언어공학이라고 한다. 역사상 한번도 언어공학이 성공적이었던 적은 없다. - 물론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특성은 사회적인 존재에서 흔히 발견된다.

꿀벌을 통한 만데빌의 역설과, 만데빌의 역설에서부터 발달한 스코틀랜드 윤리 철학자들의 '추측의 역사', 이에 기반을 둔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등은 모두 이런 대상들에서 보이는 일특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국부의 이상적 유지, 경제적인 최대 효율성 등은 각 개인이 계획하지 않은 것으로써 각 개인인 여기에 하나의 관심도 없으며, 개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행복일 뿐인데, 이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공익적인 구조를 양산했다는 것이다. 즉 사회 전체적 공익의 구조는  이기의 결과이다.


이러한 설명은 주로 Rudi Keller(1990, Sprachwandel / 언어변화, 이기숙 옮김)을 읽고 추려온 것이다. 그는 언어의 변화와 언어의 구조의 발생에 대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회적인 대상에서 포착되는 존재의 구조가 개인의 의도와 상관 없이 이상적인 모습을 띠게 되는 경우의 예를, 파리의 퐁피두 광장에서 거리 예술을 행하는 것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이루는 원형 구조를 시시각각 그림으로 담은 어느 화가(사진가?)의 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은 다만, 1. 예술행위를 더 잘보기 위해, 2. 혼자서 너무 튀지 않기 위해, 3. 그러면서 최대한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 행동할 뿐인데, 결국 사람들이 만든 것은 원형의 구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상만을 보고,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가 원형의 구조를 만들었다고 기술하는 것은 이 현상에 대한 적절할 기술이 될 수 없는데, 왜냐면 중대장이 중대원들에게 명령해서 똑같은 구조를 만들 수도 있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현상이기 때문이다라고 켈러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Bybee(2001, Usage Based Phonology)에서는 이런 특징이 언어에 나타나는 것을 "창발"이라고 표현하였다. 표현만 다를뿐 그 본질과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사회적인 대상에서 포착되는 존재(물론 언어를 포함해서)가 어떤 구조를 가지게 되는 현상을, 대형할인매장의 요금정산게이트에 늘어선 줄의 길이들이 거의 항상 같게 유지되는 것을 가지고 설명을 하였다. 이 예와 위의 공연의 예가 알려주고자 하는 바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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