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2006) "학문의 대상으로서 언어의 위상에 대한 단상" <나랏말씀>22.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편집위원회.
학문의 대상으로서 언어의 위상에 대한 斷想
김현주(국어학반)
언어는 인간과 독립된 유기체인가,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가. 언어는 자연과학의 대상인가 인문과학의 대상인가. 공시와 통시는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의 속성인가 언어를 보는 이론인가. |
1. 들어가며
어떤 대상을 학문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기껏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학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체계적인 지식을 찾는 작업을 학문적인 연구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학문이 무엇인지, 학문적인 연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변이 이렇게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아는 학문의 각 분야들에서 추출되는 공통점이 그만큼 희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문이 무엇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두어 갈래로 나누어서 설명해야 한다. 즉, 대상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것과, 대상의 ‘인과 관계가 어떻게 항상성을 가지고 유지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것 등으로 나누어 살펴야 한다. 서양의 학문적 전통은 이러한 구분을 ‘인간의 작품에 대한 연구와 신의 작품에 대한 연구’라는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신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자연과학을 의미한다.
본고가 펼쳐갈 이야기를, ‘국어학을 포함하여, 언어학이 이 두 구분 중 어디에 포함되느냐’에 대한 답변으로 파악했다면 위의 짧은 글을 오해한 것이다1). 여기에서 독자들이 파악해야 할 것에는, 대상의 성격에 따라 학문의 정의가 달라진다는 것도 있다. 물론 이는 학문의 방법론이나 태도까지도 그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함의한다.
이제부터 본인은 Rudi Keller의 언어변화(Sprachwandel)를 읽고서 알게 된 사실과, 이와 관련하여 품게 된 생각들을 될 수 있는 한 이해하기 쉽게 말해 보려고 한다. 물론 필자에게는 일종의 복습이 되겠고, 독자들에겐 단편적이고 산만하여 난해한 글일 것이다. 이점 양해를 구한다. 그럼, 우리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질문으로 본론의 문을 열어보자.
‘언어’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은 어떤 작업이 되어야 하는가? 혹은 어떤 작업이 될 수 있는가?
2. 언어는 어떤 존재인가
2.1 언어는 인간의 가공물인가 독립된 유기체인가
自古로 어떤 대상의 본질에 대한 가장 기본적 지식을 가장 효율적으로 아는 방법은 기존의 견해들을 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학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언어에 대한 연구도 유럽에서부터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되었다. 18, 19세기의 유럽은 진화론, 원자가설, 실험 심리학 등 현대문명의 든든한 주춧돌이 되는 자연과학의 기본적 아이디어들이 여기저기서 싹을 틔우던 시기이다2). 그리고 새로 생겨난 학문인 언어학도 여기에 영향을 받게 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18세기 라스무스 라스크(Rasmus K. Rask), 프란쯔 보프(Franz Bopp), 야콥 그림(Jakob Grimm3))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역사비교언어학이 하나의 과학으로 인정되면서 언어학은 성립하였는데, 언어학사 상 최초의 思潮인 이 역사비교언어학은 진화론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다. 이 시기의 언어학자들은 대개 언어를 스스로의 원칙에 의해 진화하는 독립된 유기체로 파악하였다. 단적인 예가 독일의 아우구스트 쉴라이허(August Schleicher)이다. 그는, ‘언어는 인간과 독립된 유기체로, 내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 받으며 변한다(Schleicher 1863 : 6, Keller(1990 한국어판 : 77)에서 재인용).’고 천명하였다.
그밖에 원자주의의 영향 아래 소리의 최소단위인 음소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고, 이어서 원자들의 구조(분자)가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다는 과학사 상의 발견과 나란하게 언어학에서도 언어 단위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 단위들의 기능과 역할 혹은 체계의 관점에서 언어가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조주의 언어학이 탄생하였다는 것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처럼 언어학은 처음에 자연과학의 한 분야인 것처럼 성립되었다4). 그렇다고 당시의 언어학자들이 모두 언어를 자연과학적 대상으로만 파악한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신문법학파(Neogrammarian)나 독일의 훔볼트, 러시아 상뜨 뻬쩨르부르그(St. Petersburg)대학의 드 꾸르뜨네(Baudouin de Courtnay), 미국의 사피어(Edward Sapir) 등은 언어를 인간의 심리나 마음작용의 부산물로 파악하였다. 즉, 언어를 ‘인간이 만든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 두 견해는 모두 타당한 면을 지닌다. 현대 미국 언어학의 커다란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촘스키(Noam Chomsky)는 1980년도의 저술에서 ‘인간이 언어를 만들었다는 가정’에 단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를 당신이 만들었는가? 혹은 내가 만들었는가?’ 이런 진술은, 촘스키가 ‘언어의 사회성’을 방패로 삼아 언어의 유기체설을, 즉 언어는 인간 개인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변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언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에 따라 문화에 따라 인종에 따라 언어가 달라지는 등은 언어가 인간에 의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 두 견해 모두가 언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이 두 견해는 모두 언어라는 존재를 적절하게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2.2 공시성과 통시성
언어는 변한다. 이는 경험적인 진리이며5) 언어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공시성’과 ‘통시성’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공시(Synchronie)’와 통시(Diachronie)’가 언어의 두 가지 존재 방식인지 아니면 언어 연구의 방법론 즉 언어학 이론인지 종종 혼동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에서 사용된 ‘공시’와 ‘통시’라는 용어는 다른 두 관점에 의한 두 분야를 명확히 분리하자는 제안으로 해석하기에 유리하다(Keller 1990 : 179)고 한다. David(1991 : 서론)에서도 공시와 통시는 편의적인 구분이며 언어 자체의 본유적인 속성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공시’와 ‘통시’는 언어 본유의 특성이 아니라, 언어학자들이 언어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이다.
언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때, 공시적 관점(공시태)과 통시적 관점(통시태)을 나눠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연구의 편의에 있다. 즉, 언어를 그 자체로 체계적인 존재로 본다는 전제 아래, 언어의 변화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체계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시기별로 언어의 체계들을 먼저 살피고 이 체계들을 시간에 따라 보여줌으로써 언어의 변화를 기술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6). ‘공시태와 통시태’의 관점은 특정 시점의 언어를 공시적으로 ‘記述’해주고 그것이 전에는 어땠으며 그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통시적으로 ‘記述’해줄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기술을 언어학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공시태’와 ‘통시태’의 두 관점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고 타당한 일이다. 실제로 20세기 전반까지의 구조·기술주의 언어학은 이런 記述을 목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촘스키는 이런 언어학의 목적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2.3 설명적 타당성의 우위와 언어의 역동성
촘스키는 통사이론의 목적이 통사적 현상의 ‘기술’이 아니라 ‘설명’이라고 말했다7). 이는 비단 통사이론에만 한정된 명제는 아니다. 어떤 경험적 현상을 다루는 이론에서, 현상의 상태가 A상태에서 B상태로 바뀌게 되는 인과관계를 밝히는 이론은, 이전 상태와 결과 상태를 단순히 기술해 주는 이론보다 더 우월한 것이다. ‘설명적 타당성’을 요구하는 것은 언어학을 보다 합리적인 학문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필수부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언어를 이런 과정을 통해 설명하는 작업은 대개 「일반언어학강의」에서 말하는 ‘공시태’와 ‘통시태’의 관점 중 어느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현재의 언어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런 결과에 이르게 한 ‘과정’을 ‘설명’하고 그런 과정의 전제가 되는 ‘조건’을 기술해 줘야 하는데, 그러한 ‘과정’과 ‘조건’은 대개 그 이전시기부터 퇴적적으로 지금의 상태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일정한 조건에서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언어행위의 하나하나가 언어의 변화에 기여한다. 즉 언어의 상태는 항상 역동적이다.
아무리 편리하고 단순명쾌하다고 해도, 이론이 그 이론의 적용 대상의 어떤 부분을 왜곡하여 그 부분에 관련된 사실에 대한 합리적 접근을 어렵게 한다면, 그 부분에 대한 해당 이론의 정당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언어학에서 공시태와 통시태를 구분하는 이론은 언어의 역동성을 배제시킨다. 「일반언어학강의」가 말하는 통시태는 어떤 시점의 공시태와 다른 시점의 공시태의 연대기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특정 시점에서 언어의 상태를 ‘기술’하기엔 적합할 수 있지만,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하다.8)
요는, 언어 연구가 공시·통시태의 양자택일적 관점을 취해야 하며, 통시태란 공시태의 연속적 기술이므로 공시태를 먼저 확립한 다음에야 통시태에 대한 기술이 가능하다는 견해는, 언어의 역동적 상태를 배제시키고, 이는 언어의 특정 상태의 존재이유(Raison d'être9))를 ‘설명’하는 이론이 타당성을 얻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2.4 제 3의 현상
앞의 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언어의 속성은 ‘신이 만든 것일 수도, 인간이 만든 것일 수도 있고’, ‘공시태와 통시태로도 관찰이 가능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역동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막스 뮐러(Max Müller)나 위트니(William D. Whitney) 같은 그 시대의 저명한 언어학자들도 이러한 언어의 특성을 흐릿하게나마 인식은 하고 있었다10). 그리고 이런 속성을 지니는 경험적 현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류는 19세기에 와서야 깨닫게 된다. 그 시작은 철학자이자 의사이자 시인인 만데빌(Bernard Mandeville11))이 1705년 지은 “불평하는 꿀벌들 : 정직해진 악당들”이라는 한편의 시에서부터이다.
만데빌의 시를 모두 소개하는 일은 도서관에 있는 그의 책에 넘기고, 여기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일으킨 시의 내용을 간단하게 언급하도록 하겠다. 요는 이렇다.
: 꿀벌 사회는 인간의 사회와 닮아 있다. 정치가, 법률가, 매춘부 등등 사기꾼이 없는 직업이 없다. 꿀벌들이 자신의 이기를 위해 생활하는데도 꿀벌 사회는 날로 번창해 간다. 자세히 보니 꿀벌 대중의 악덕은 꿀벌 대중의 복지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 몇몇 꿀벌들이 자신들의 악덕은 눈감으면서 동료의 악덕을 주피터에게 고발하자 주피터는 이들의 소원들 들어주어 모든 꿀벌들의 마음속에 성실함이 충만하게 하였다. … 법률가와 목사는 더 이상 할일이 없어졌다. 대장장이와 사형 집행인은 실업자가 되었다. … 어리석은 자들만 도덕국가를 만들려고 할 뿐 … 유토피아는 상념 속에만 있는 것. 만복의 시대에 살고 싶은 자 성실 못지않게 도토리도 즐길 줄 알아야 하나니. - Keller(1990 한국어판 : 51~54)에서 재인용.
몇몇 독자는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본고에 실린 이 짧은 시에서, ‘왜’인지는 모르지만, ‘공리주의’로 대표되는 스코트랜드 도덕철학자들과 그 마지막 계보에 넣을 수 있는 ‘자본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를 떠올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 답답한 느낌의 덧옷들을 차례차례 헤쳐 보겠다.
간단히 말해, 만데빌의 시를 통해 당시 지식인들 깨달은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개별적인 ‘의도’가 만들어내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써의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을 일컬어 제 3의 현상이라고 Keller(1990)에서 정의하고 있다. 즉 신이 만든 현상(자연현상)이 제 1의 현상, 인간이 의도적으로 (그리고 그 의도가 성공적으로 반영되어) 만들어진 현상을 제 2의 현상, 그리고 인간의 행위는 의도에 의한 것이지만, 그런 행위들의 결과는 개인의 의도와 거리가 먼 현상을 제 3의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자본론에서 이런 과정, 즉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때, 시장은 최대 효율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개인은 결코 ‘사회의 경쟁력을 위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당대의 학자들은 이런 현상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 3의 현상에 대해 매우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이 역시 경제학자였던 칼 멩어(Karl Menger)였다. 그는 1883년 출간된 “사회학과 정치경제학의 방법에 관한 연구”라는 책에서 제 3의 현상에 대해 다루며 ‘언어, 종교, 법, 국가, 시장’ 등을 열거하고 있다.(Keller 1990 한국어판 : 95~96) 여기에 분명히 ‘언어’도 포함되어 있다.
믿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대학교에서 흔히 일어나는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12). 우리는 교수가 아닌 강사들을 높여 부르기 위해 ‘교수님’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분명 목적은 강사를 높여 부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의 非一非再는 ‘강사’를 ‘강사’로 부르는 것이 비하하는 뉘앙스를 지니게 만들었고, ‘교수’를 ‘교수’라고 부르는 것도 비하하는 뉘앙스를 지니게 만들었다. 신입생들은 어쩌면 ‘교수’는 ‘과장’과 같은 직책명이라며, 스승은 ‘교수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고지식한 고학번들의 꾸지람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어의 속성상 그런 순화의 의도는 그대로 전체 언어에 반영될 수 없다. 가령 ‘벤또’가 ‘도시락’이라는 옛말로 성공적으로 순화된 것은 ‘도시락’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벤또’가 싫어서이다13).
그림 2
그림 1
언어가 제 3의 현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주기 위해, 전혀 다른 접근법을 취한 Bybee(2001)에서도 Keller(1990)과 같은 구조 예를 통해 언어의 변화를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Bybee(2001)과 Keller(1990)에서 언어를 설명하기 위해 드는 예들이 보이는 체계적 유사성을 언급해 보자.Keller(1990)에서는 제 3의 현상에 대한 예를 들기 위해 사진 몇 장을 보이고 있다. 첫 사진에는 프랑스 퐁피두 광장에서 거리 예술가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주위에 몇몇의 관람자들이 있다. 다음 사진은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의 것이다. 이번 사진에서는 사람들이 거리 예술가의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 두 사진의 비교를 통해서 Keller(1990)은 이 원형의 구조가 생겨나게 된 원인과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원형을 만들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다만, 관람객들은 다음과 같은 판단에 의거하여 행동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첫째, 될 수 있는 한 공연이 잘 보이게 설 것, 둘째, 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도 같이 볼 수 있게 할 것, 셋째,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 받지 않도록 할 것 정도일 것이다. 이런 행동의 판단 기준들이 여러 사람에게 같이 적용될 때 그런 판단이 의도했던 것이 아닌 원형의 구조가 나타나게 된다. 이런 내력이 있는 현상을, 단순히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원형의 구조를 만들었다’라고 기술하는 것은 이 구조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거리공연의 구경꾼들이 원형구조를 만드는 것은 부대장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원형의 구조를 만드는 것과 전혀 다른 존재이다. Keller(1990)은 제 3의 구조는 몇몇 행위의 조건들과 그것에 의해 예측되는 일반적인 원리들에 의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이때 이런 조건들과 일반적인 원리들의 작용을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Bybee(2001)은 인지적인 관점으로 언어를 바라본다. 이 책에서는 인지라는 심리적 현상을 파악하는 한 방편으로 빈도를 이용하고 있다. 그녀는 새로운 어형이 출현하는 절차 중 한 가지를 소개하며 ‘창발(emergence)’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요는 다음과 같다. ‘특정 의미를 가지는 특정 어형의 높은 빈도는 특정한 구조를 창발시킨다.’ 그러면서 그녀는 ‘창발’을 이해시키기 위해 언어 외적인 현상에 나타나는 ‘창발’의 예를 몇 가지 들고 있는데 이들이 다름 아닌 제 3의 현상들이다. 그녀는, ‘벌집 모양이 6각형을 이루는 것’이나, ‘대형 할인 마트의 여러 계산대에 늘어선 줄들의 길이가 항상 거의 같은 길이로 유지되는 현상’ 등이 구조가 창발되는 예로 들고 있다. 벌들은 육각형의 집을 지으려는 목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계산대의 줄을 모두 같은 길이로 맞추기 위해 행동한 것이 아니다. 벌의 예는 벌의 행위본능과 관련된 것이고, 할인마트의 예는 좀더 빨리 계산을 마치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의 결과이다. 물론 그리고 분명 이는 제 3의 현상이 나타나는 과정과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의 형태·의미 변화 과정을 인지문법적인 입장에서 살펴본 적 있는 필자가 판단하기에, 인지문법가들이 말하는 인지적인 과정은, 제 3의 현상을 발생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 가운데 언어구조와 관련된 일반적인 한 패턴인 것 같다. 이제, 경제현상이나 사회제도와 같이, 언어도 제 3의 현상이라고 상당 정도로 동의할 수 있다는 말로 이번 소절을 마무리 짓겠다.
3. 언어의 무엇을 어떻게 취급하려고 하는가.
그럼 언어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물론 아니다. 앞서 짧게 언급한 뮐러나 위트니처럼 몇몇 언어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언어학자들은 언어가 제 3의 현상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기보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관심을 오래 가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이유란 아마도 당시 언어학의 관심이 ‘공시태적인 기술’에 있었다는 상황일 것이다.
이제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낼 때가 된 것 같다. 우리는 대상의 성격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학문의 방법론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글의 첫머리에서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제 언어는 제 3의 현상임도 어느 정도 확인하였다. 제 3의 현상인 존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우선, 인간 개개인의 의지가 반영되는 부분이 있다. 이를 미시적 부분이라고 부르겠다. 다음으로 인간의 행위의 결과이지만 그 행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나타나는 구조의 부분이 있다. 이를 거시적 부분이라고 부르겠다. 마지막으로 그 구조가 나타나게 되는 과정 즉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가 작용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을 ‘범시적 영역’ 혹은 ‘보이지 않는 손의 영역’이라고 부르겠다.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언어는 세 가지 특성을 가진 다른 존재로 파악이 된다. 따라서 언어를 학문적으로 다룰 때에는 세 가지의 다른 방법론이 적용될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제 그 세 가지 구분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3.1 미시
언어의 미시적 부분은 인간의 의지가 반영될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적인 원인에 의한 문체·화용 상의 특성 등이 이 부분에 해당할 수 있으며, 언어를 인문학적으로 연구한다면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구는 언어 전체적인 구조나 변화의 경향에 대해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3.2 거시
언어의 거시적 부분은 인간의 의지가 투명하게 반영되지 못하고, 언어가 흡사 자연물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부분이다. 공시적인 분석이나 문법의 규칙 등이 이 부분에서 추출될 수 있다. 언어를 자연과학적으로 연구한다면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되어야할 것이다. 다만, 이론적으로 공시태란 가상의 순간이고, 현실의 물리적 시간으로 환산하면 ‘zero’이며, 매순간이 새로운 공시태의 대상이 되므로, 인간이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완벽한 공시적 연구란 완전히 불가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이 부분에만 한정된 연구는 언어의 변화를 ‘기술’할 수는 있지만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3.3 범시
범시적 부분은 개인적인 언어 사용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제 3의 현상으로서의 언어를 창발시키는 과정의 부분이다. 언어에 있어, 경제현상이나 문화현상 같은 사회과학적인 측면은 바로 이 부분과 관련된다. 언어 변화에 대한 ‘설명’은, 그것을 ‘범시태’라고 부르든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라고 부르든 혹은 ‘문법화’이든지 이 부분을 주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4. 결론이나 정리가 아닌 마무리
본론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독자들의 명석함에 맡기고 여기에선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마무리 짓겠다. 국어국문학과의 학과지에서 ‘국어’가 아닌 ‘언어’에 대해 다룬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문학이 문학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이해되고 설명될 수도 없듯이, 국어학(Korean linguistics)과 언어학(linguistics)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거시적으로 언어가 인간과 별개인 것처럼 보여도 인간과 별개일 수는 없다. 거시적인 언어도, 비록 의도한 그대로가 아닐지라도, 결국 인간 의지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다. 거시적인 언어는 유사자연과학적(pseudo-scientific) 현상일 수는 있지만, 실제의 자연과학적 현상은 아니다. 또한 언어가 무의식 중에 만들어내는 전체로서의 사회과학적인 구조를 갖는다고 하여도,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전혀 의미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이 인간이라는 변덕스러운 동물을 끼고 연구될 수밖에 없음에야, 이 두 범주의 경계는 인식의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국어학은 국문학과 마찬가지로 (‘신체’가 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를 그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대학엔 초·중등 교육기관처럼 배우라고 정해진 구체적인 어떤 것들이 정해져 있지 않다. 물론 이 말이 구체적인 어떤 배울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초·중등 교육기관이 아니면서 그렇게 구체적으로 배워야할 것을 정해 놓은 곳을 전문대학 내지 학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타오르는 자유의 횃불을 가슴에 품은 ‘인간’이다. 여러분은 한국어를 재료로 삼아 그런 ‘인간’에 대한 탐구의 길을, 나나 나의 선배처럼 자유의사를 가지고 ‘선택’했다.
건방진 제안으로 글을 마치겠다. ‘인간’에 대한 탐구와 이해는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다. 막노동판에서도 증권거래소에서도 일반대기업의 어느 사무실에서도 학교의 교단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이 식는 순간, 어느 곳에서도 ‘인간’에 대한 탐구와 이해는 불가능할 수 있다. 인문학을 전공한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삶의 지도를 어떻게 그려나가든 상관없이, ‘인간’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을 잃지 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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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Saussure, Ferdinand. 1916.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Translated by Wade Baskin, McGRaw-Hill)
1)오해와 이해는 모순개념이 아니다. 일상 대화에서 이해와 오해는 종종 공존한다. 화자의 의도를 알게 되는 것을 대화상의 이해라고 할 때, 그 이해에 더해 화자가 의도했던 것 이상을 해석해 내면, 그것도 오해라고 한다. 따라서 화자가 의도했던 여러 가지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완전한 오해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닌 이상, 흔히 ‘오해했다’고 할 경우 언제나 이해와 오해는 공존한다.
2)하지만, 진화론이 스코트랜드 도덕철학자들의 사회과학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Radl 1909 : 198, Keller(1990 한국어판 :207)에서 재인용)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지 않다.
3)여담을 하자면, 그림동화의 작가인 그림 형제 중 한명이 바로 이 야콥 그림이다. 영화 <그림 형제>에서는 영어식발음은 /제이콥/(/제이크/는 애칭)으로 불린다, 영화에서는 야콥이 동생인지 형인지가 불분명하다.
4)철학과 문학의 강력한 영향을 피해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5)이러한 사실들이 ‘진실’인지 ‘연역적’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가령 ‘모든 경험세계는 변한다. 언어도 경험세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고로 언어는 변한다.’라는 논리는 다시 ‘모든 경험세계는 변한다.’는 명제가 ‘진실’인지를 증명해야 한다. 이를 증명한다고 해도, 다시 같은 종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6)드 소쉬르(de Saussure, Ferdinand)의 생각이나 주장과 관련하여, 심하게는 모순되게까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이유 중 상당한 부분은 그의 저서(라고 알려진) 「일반언어학강의」(원제 :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의 내용과 관련된다. Keller(1990 : 179)를 인용해 보자. 알다시피 이 책은 드 소쉬르 사후에 나온 책이고, 그의 수업에서 수강생들에 의해 기록된 노트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직접적인 저자는 ‘샤를 바이’와 ‘알베르 세슈에’이고, 이들은 드 소쉬르의 수업을 듣지 않았다. 우리가 현재 접하는 「일반언어학강의」의 “원전”은 학생들의 강의 노트와, 당대 이미 저명한 언어학자로서 자신들이 지녔던 언어적 관점과 지식이었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도 해석상의 왜곡을 지닐 수밖에 없었던 미흡한 노트에서 강의를 “재구성”할 때, 저자들 자신의 이론들이 드 소쉬리의 것으로 섞여드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7)촘스키의 이론은 모든 인류의 머리 속에 있는 공통된 문법, 즉 UG(Universal Grammar, 보편문법)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UG는 과거의 언어이든 현재의 언더이든 영어이든 한국어이든 모두 동일하다. 이 이론의 신봉자들은, ‘우리가 읽고, 듣고, 보고, 쓰는 표면의 언어는 UG와 해당 언어의 내면 문법(I문법)을 통해 도출되는 것으로써, 그 도출 과정에 관여하는 여러 규칙들을 통해 UG가 I문법을 거쳐 최종적인 표면의 언어(E언어)로 나타나게 된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생성문법은 언어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엔 큰 관심이 없다. 생성문법이 ‘설명’하려는 것은 인간의 언어‘능력’이다.
8)해당 상태를 이끄는 다양한 원인들은 대개 퇴적적으로 작용하므로 공시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또한 그런 작용들은 해당 상태에 대해 의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Bybee(2001)에서는 언어의 변화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공시태나 통시태가 아닌 범시태(Panchronie)를 상정하였고, Keller(1990)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를 상정하였을 것이다.
9)역사적 학문, 즉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대한 학문의 1차적 목적이 존재이유(Raison d'être)를 밝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여기에서 이 어휘를 언어의 어떤 시점이든, 한 시점을 고정한다고 해도, 안정되고 정태된 상태가 아님을 강조하는 의미로만 사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고정되어 있지만 역동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조각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우리 주위에 널렸다.
10)그럼에도 불구하고 뮐러는 언어를 자연물로, 위트니는 인간의 가공물로 보았다. 당시, 서양의 학문적 전통이 세계를 그 둘로만 나누어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문화로부터 그 구성원에게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사고의 틀(이를 흔히 ‘집단의 기억’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한다.)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11)1670년 로테르담의 명망 있는 위그노파 집안에서 태어났다. 라이덴 대학에서 1689년에 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691년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1696년에 영국으로 가서, 1699년에 영국 여인과 결혼하여 그곳에서 신경 및 위궤양 전문의로 활동하다 1733년 1월에 생을 마감했다. 만데빌의 역설은 스코트랜드 도덕철학파의 사상과 관련이 깊다. 밴덤이나, 애덤 스미스가 이 철학 사조에 기반하고 있으며, 앞서 언급했다시피 다윈의 진화론도 이들의 사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12)이런 식의 언어변화에 해당하는 좀더 전문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15, 16세기 국어에는 객체높임을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종종 문장의 객체(목적어나 여격어 따위의 외연)와 청자가 일치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 경우 청자높임의 선어말어미 {--}는 거의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반면, {--}은 그럴 필요가 없었고,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체인 청자를 높이기 위해 {--}은 어느 정도 사용되었고 이런 경향이 후대로 올수록 강해진다. 이런 쓰임의 확장은 결국 {--}의 의미를 청자높임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는 화자들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현대국어 ‘습니다’의 ‘습’이 {--}의 후계형이다.
13)그런 의미에서 언어 정책은 경제 정책에서 본받을 바가 크다. 건설 경기를 살리기 위한 정부의 고전적 정책은 건설 관련 대출 이자율을 낮추는 것이다. 건설업자들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은행에서 돈을 빌려 건물을 짓지만, 그 결과는 종종 건설 경기의 활성화로 나타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순화하기 위한 정책은 ‘이런이런 말’을 쓰라고 공표하는 방식이어서는 성공적일 수 없을 것이다. 언어 순화의 정책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어야 한다. : 만약 전국민적 증오의 대상이 되는 어떤 드라마의 악역배우가 ‘순화해야할 대상이 되는 어휘’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게 할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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