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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zing

Raison d'Etre

by 앎의나무 2004. 12. 4.
만약 인간에게서 다양한 종류의 情들, 가령 우정, 애정, 모정, 부정 등등과 기타 따듯함, 고마움 등등으로 표현되는 <인간다움>이란 걸 빼버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저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멍청하게 먹이나 나르다 사라지는 개미보다 하나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실재하느냐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는 없다. 인간이란 결국 누구나 혼자인 존재이며, 따라서 모두 이기적이고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는 쪽의 견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삶의 지향을 결국 이 두 극단의 어느 사이인가를 왔다갔다 하며 삶이라는 시간을 소진한다. 공자나 예수 같은 인간들은 전자에 극도로 몰두한 인간들이며, 애덤스미스 같은 인간은 극단적으로 후자쪽의 가치관을 가진 인간일 뿐이다.

골때리는 세상이다. 저런 후자의 가치관 아래 구조화된 자본주의에 물들어 살아가게 된 이시대의 서울 밤하늘엔 무수한 십자가가 보이며, 수많은 종교인들이 교세확장을 위해 애쓴다. 이것이 바로 이 두 축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기 만족을 채울 수 없다는 거대한 증거가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주물럭대는 틀안에 갇혀 산다. 정말 잔인하다. 소에게 꼴을 먹일 때는 배가 불러 나태해지지 않을 만큼만 먹인다. 샐러리맨에게는 한 달간 한 가족이 살 만큼의 급여만으로 충분하다. 신도들에게는 마음의 불만이 쌓이지 않을 만큼의 용서와 구원과 희망이라는 언어 혹은 윤리의 백지수표로 충분하다. 최대의 수확을 위해, 지배자들의 지위를 공고히 지키기 위해,

최대의 생산성이 최상의 가치인 지배자들의 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 대안이 없다. 누군가 혁명이 성공한다고 해봤자 그건 다른 지배자들이 생긴다는 말의 다름이 아니다.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마음 속 꼭꼭 간직한 채,
스물아홉, 소년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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