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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izing/Small is beautiful

똘똘한 것과 슬기로운 것의 차이

by 앎의나무 2010. 6. 22.
슈마허의 짧은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는 '불교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챕터가 들어 있습니다.
제목에는 '불교'가 있지만, 종교와는 거의 관계 없는 내용이에요.
인간 사회에 가능한 중심 가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 자체가 '경제'라는 개념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그에 따른 비전을 제시해주는데요,
제게는 그 중에서도 '불교 경제학' 챕터가 오래 동안 남아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뭐랄까... 발상의 전환으로 돌파구가 생겼을 때의 희열이라든지, 희망이라든지, 훈훈함이라든지 말이에요.

엊그제 다람쥐길을 걷다가 문득 불교경제학에 적혔던 내용이 떠올랐어요.
그러면서 따라온 생각들이 몇몇 있는데 여기에 적어봅니다.

나찌가 학살했던 많은 사람 중 훌륭한 예술가, 인류진보를 앞 당길 사상가, 우리의 앎을 넓혀줄 학자가 있었을 수 있겠죠. 
반대로, 연합군이 죽였던 연맹군 중에도 그럴 수 있는 이들이 있었겠죠. 
하지만 서로를 부정하고 없애야 할 상대로 보는 구조에서 그들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또 생각해 봅니다. 
국민학교 시절, 남들보다 조금 발달이 늦어 공부 못하는 아이로 찍히고, 그렇게 항상 공부에 대한 자신감 없이 자라온 학생들 중에 실은 초등학교 고학년 나이 쯤에는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난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성적이 낮은 아이들 중에는 능력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일괄주입되는 지식들에 의문을 품고 있는 아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실은 이런 아이들이야 말로, 남과 다른 시각과 생각을 가지는 아이들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 후보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은 우리의 경쟁 시스템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또 생각해 봅니다.
살아 남는 게 목표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꼭 상대를 눌러야 살아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당연히 협력이 더 나은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왜 경쟁할까요?

저 스스로를 돌이켜 봤을 때, '경쟁' 그 자체도 사회화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은연 중에 우리는 '경쟁'을 본질적인 것으로 교육받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걸까요.

우리가 한 단계 더 진화하기 위해서는 이걸 변화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류에게 생물학적 진화는 끝났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자연선택이란, 죽음과 삶에 의해 결정나는 것인데, 인류의 의술은 더 이상 자연선택에 인류를 내맡기지는 않으니까요)
대신에 정신적 차원의 진화가 남아 있다고 보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종종 주변에서 아주 빼어난 사람들을 봅니다.
머리도 좋고, 인간관계도 좋고, 항상 활기를 나누어주고, 다른 사람을 잘 도와줍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습니다.
아주 반짝반짝하는 존재들이죠.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마치 자기욕심은 없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욕구가 없고, 또 자기를 '희생'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들은 아마도 '윈윈'으로 상황을 이끌어 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점이 바로 다만 지능만 높은 사람들과의 차별성이고, 우리가 지혜롭다고 하는 그런 점이 아닐까 합니다.
협력이 경쟁보다 낫다는 걸 체득하고 있든, 논리적으로 알고 있든 말이죠.

협력의 결과가 경쟁의 결과보다 인간관계나, 사회가 품게 될 앞으로의 가능성면에서 낫지 않을까요.
제가 주변의 그런 사람들을 관찰하고 추론해본 결과 그들의 목적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목적은 더 나은 결과 상황인 것 같습니다.

아마 저도 포함될 텐데, 경쟁에 찌든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대해서조차 시기심과 두려움과 경쟁의식을 가집니다.
지혜가 부족한 것이지요.
그래서 가끔 말도 안 되는 해코지를 하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경쟁하려는 사람을 더 많이 대체할수록 더 나은 세상이 가까와 오리라 생각합니다.

나이든 후에도 제가 적은 이 글이 저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