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바리기3

내가 가장 이뻤을 때 내가 가장 이뻤을 때 길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쪽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몸맵시를 생각해 볼 틈마저 잃고 말았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그 누구 하나 다정한 선물도 보내주지 않았다 사내들은 거수경계밖에 모르고 서글서글한 눈매만 남겨놓고 죄다 떠나갔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내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딱딱했고 손발만이 밤빛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 졌다 어디 그럴 수가 있는가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올리고 비굴한 동네를 걸었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들렸다 금지된 담배연기를 들이마셨을 때처럼 어찔어찔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 2007. 1. 17.
나무열매 드높은 우듬지에 푸르고 큼직한 과실이 한 개 현지의 젊은 애가 쭈르르 나무를 타고 올라 손을 뻗치려 하다가 굴러 떨어졌다 나무 열매로 보였던 것은 이끼 낀 한 개의 촉루이다 민다나오 섬 26년의 세월 정글의 조그만한 나뭇가지는 전사한 일본 병사의 해골을 어쩌다가 슬쩍 걸쳐서 그곳이 눈구멍이었던가 콧구멍이었던가도 모른 채 젊고 튼튼한 한 그루의 나무로 거침없이 성장했던 것이다 생전 이 머리를 소중하게 귀여운 것으로 끌어안았던 여자가 물론 있었을 테지 어린 관자놀이의 숫구멍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분은 어떤 어머니 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정답게 끌어안던 이는 어떤 여자 만일 그 여자가 나였더라면······ 절규하고 그대로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시금 草稿를 꺼내 메워 두어야만 할 縱行 찾아내질 못해 다시.. 2007. 1. 17.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가 물 주는 것을 게을리 하고서는 나날이 까다로워져 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초조함이 더해 가는 것을 근친(近親)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얼 하든 서툴기만 했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초심(初心)이 사라져 가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초에 깨지기 쉬운 결심에 지나지 않았던가 잘못된 일체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을 발하는 존엄(尊嚴)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바보같으니라고 - 이바라기 노리코,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중에서 2007.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