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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zing/Maturana and Varela

존중, 아름다움

by 앎의나무 2008. 7. 27.

관용과 존중

 

만일 사람들이 서로 존중한다면 그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풍요로운 대화와 생산적인 교환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사람들이 추종을 요구한다면, 차이나는 견해들은 부정(negation)의 동기들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우리의 행복(well-being)을 유지하고 증진시키는 것을 한다. 쾌락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삶의 결정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용을 가지라는 것은 아니다. 관용은 ‘괄호 없는 객관성’의 길로 편향된 표현이다. 관용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정당한 것으로 되어야 한다고 이미 결정해버린’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폄하를 잠깐 동안 연기하고 유예하자고 제안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들만의 관념과 믿음이 전면에 그대로 내세워져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잘못되어 있지만 그들의 파괴는 잠깐 미루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관용이다. 하지만 ‘괄호 친 객관성’의 방식을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경의를 가지고 대하게 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들의 실재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근본적 존중의 자세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행위에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어떤 초월적 실재나 진리에 호소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책임을 충분히 자각하면서 행동한다. 우리는 지금의 세계를 좋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활동적이 되며 책임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거부하거나 상호존중 속에서 분리를 수행한다.

 

내가 말하는 존중은 경청하고 상대의 진짜 의도를 이해하게 하고, 이를 통해 납득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의 실재들에 대한 존중만이 그들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주의 깊은 행위를 취하는 걸 가능하게 해준다.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용은 상대의 의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고정된] 믿음이 그들의 지각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적들을 존중하게 되면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들에게 맞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어떤 식으로도 지배와 연루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이 매우 근본적인 종류의 존중을 증진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결코 누구도 확신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대화와 경청이 한 방법이다. 소위 윤리적 법률과 규범들조차 성찰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그것들은 인간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의 토대를 제거하고 복종을 요구한다.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폭정을 위한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하다. 당신은 어떤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이 선택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의 믿음과 행위들에 내재해 있는 결과들을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강제하거나, 사물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다소 폭력적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즉, 좀 더 바람직한 형태의 새로운 종류의 사고를, 좀 더 바람직한 형태의 ‘더불어 살기’를 요청하며, 동시에 이러한 변화를 전혀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무조건적인 존중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에서의 변화를 불러온다. 깨달음은 어떤 식으로건 강제에 의해 생겨날 수 없다. 개인적인 통찰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 나와 세계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불가피하게 폭정의 유혹에 직면케 한다 할지라도 내가 분명 다른 종류의 세계[폭정이 없는 세계]를 원할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서로를 존중하는 협력적 개인들이 구성하는 민주적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계를 갈망한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더불어 살기’에 기여하고 싶다. 그것은 압력과 폭력 없이 실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민주주의를 살아 있도록 유지하기 위해 민주적으로 고무된 개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즉 여행이 곧 목적지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용 가능한 수단은 내가 도달하고자 원하는 목적의 직접적 표현이다. 누구에게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

 

만일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실수를 바로잡을 것이다. 자신의 견해를 바꿀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은 성찰할 수 있다. 사람들이 언제라도 일어나서 떠날 권리를 갖고 있다면 사람들은 원하는 경우에만 머물 것이다.

 

 

아름다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즐긴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들이 기분 좋은 느낌을 줄 때 ‘아름답다’고 한다. 불쾌하고 추하다는 판단은, 기분 좋고 유쾌한 것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가능하다. 미적인 것은 조화와 기쁨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향유이다. 미적인 체험들은 사람들의 삶을 변형시킬 수도 있다.

 

설득하려는 모든 시도는 압력을 가하게 되고 귀 기울여 듣기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없다. 압력은 원한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을 조작하고자 하는 것은 저항을 자극한다. 조작은, 혜택이 되고 득이 된다는 인상을 주는 방식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조작을 당한 사람들의 행동은 조작을 하는 사람들에게나 유용하다. 조작은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다.

 

미적인 드러냄과 관련해서 가능한 유일한 일은 그저 온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과 내가 하고 있는 것 사이의 어떠한 불일치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말해지는 것과 행해지는 것 사이에 불일치가 없을 때에만, 핑계도 없고 압력도 없을 때에만, 美는 펼쳐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 기울여 듣고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제약 없이 유쾌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만큼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은 공격받지 않으며, 어떤 것을 하도록 강제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자신을 적나라하게, 무방비 상태로 내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언제나 바람직하게 미적으로 유혹적이다. 모든 질문과 두려움이 갑자기 정당하게 되고, 서로 마주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마뚜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中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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