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음운론 공부모임에서 본인이 발제했던 글입니다.
이 글은 Gunther Kress의 Leraning to write (2판)의 5장을 발제한 것입니다.
"#번호"는 각 소챕터 내의 단락의 순서이니다. 가령 #1는 첫 단락입니다.
Chapter 5, Genre, 요약발제 쟝
i 장르와 실제 (Genre and Reality)
#1·2 문어에는 새로운 통사론, 새로운 통사 단위, 그리고 새로운 더 큰 단위가 존재한다. 문장이 사고·지각·분류를 표현한고, 텍스트는 이들을 보다 큰 전체로 조직한다. 곧 작자가 만들고 싶어 하는 질서(order)를 표현하는 것으로, 텍스트 구조는 세계를 참조하고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이는 문장이 세계를 부호화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3 작자가 글에 부여할 수 있는 텍스트 구조 질서의 다양성은 한정되어 있다. 이미 세워진 관습화된 형식들이 있다. 각 문자 문화권에 이미 고유한 장르들이 존재한다. 창조성은 생각이나 세계관을 부호화하기 위해 선택된 문형·장르에 따라 결정된다.
#4 글쓰기 학습의 한 부분으로써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숙달해야 한다. 장르들 각각이 형식적 구조, 주제 배열, 지식의 종류 등에 대한 고유한 요건들을 가지고 있다. 이 요건들은 문장과 그 이하 수준에 영향을 준다. ‘장르’의 성취(master)는 글쓰기의 성취에 있어 필요한 통합적 부분이다. 장르와 글쓰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5 장르는 대체로 학교에서 교육된다. 그러나 몇몇 문학 장르를 제외하고는 도외시되고 있다. 게다가 장르에 대한 관심은 교육 과정 후기의 글쓰기에서나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또 장르는 글쓰기에 대한 다른 강조사항에서나 확인이 된다 ; 격식적·비격식적인 언어적·사회적·인지적 의문보다 미적·심리적인 것에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주요 장르는 기술(技術)적·과학적·기술(記述)적·역사적 장르 등이다. 창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기나 목적이 뭐든지 아이들은 적절한 장르나 구조적 특징에 대한 교육 없이 ‘이야기’를 쓰도록 요구받는다.
#6 그래서 아이들은 장르별 요건들을 알게 모르게 습득해야 한다. [제대로 교육받는 것이 아니다.] 읽기·받아적기 등 그 목적이 뭐든 간에 애들은 자신이 대하고 있는 글의 장르에 해당하는 형식과 규칙을 자신에게 삼투시킨다.
#7 아래 두 글은 한 7세아의 글로 하나는 서사이고 하나는 사실적 기술(記述的)이다.
[텍스트 20, 가난한 두 사람], [텍스트 9, 쥐]
#8 아이는 ‘요정 이야기’라는 장르를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지만 요정 이야기의 전형적 내용 및 텍스트적 특징과 구조적 특질을 습득한 상태임이 분명하다. 비록 완전히 이 장르를 숙달하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형식적 특징인 ‘과거시제’ 사용이 숙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내용구조 측면에서, 아이는 이 장르의 등장인물의 유형을 알고 있다.
#9 ‘쥐’는 반대이다. ‘가난한 두 사람’의 모든 구조적·텍스트적·내용적 특성이 여기서는 결여되어 있다. ‘가난한 두 사람’의 갈래적 특성 중 어떤 것을 ‘쥐’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두 텍스트가 갈래적으로 얼마나 특징적인가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시제의 사용이 중요하다. 앞 이야기는 과거시제를, 뒤 이야기는 현재시제를 사용한다. 요정 이야기의 경우엔,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쥐 이야기의 경우에도 같은 원인에 의해 현재시제를 사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무엇이 원인이든, 픽션과 과거시제의 연합 그리고 사실성과 현재시제의 연합이 아이에게 구축되어 있다. 이로 인해 시제의 의미의 기초의 하나가 닦인다. 현재시제의 사실성과 과거시제의 픽션성. 이 구분은 지식의 형식(form)들의 ― 즉 현재시제로 제시되는 것은 시실의 지식이고, 과거시제로 제시되는 지식은 가상적인 것이라는 사이의 형식적 구분의 시작이 된다. 전자는 과학적 장르로 발달하고 후자는 인문 장르로 발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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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사실적 장르(Factual Genre)
#1 사실적 장르의 발달은 교육 체제의 커리큘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본고의 자료는 특정 교육체제에 기초하므로 일반화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원칙은 일반화가 가능하다. 커리큘럼의 분화는―그것이 학교 교육의 초기 단계에서 아무리 분명하지 않다고 해도― 출현하게 될 장르의 유형과 나타나게 될 순서를 결정한다.
#2 초등학교 체제에서 내가 언급하는 주요한 커리큘럼의 구분은 글쓰기의 발달에 관한 한 사회적 연구들과 국어(English)의 범위 안에서이다. 전자는 모든 사실적 영역을 가로지른다 : 역사, 지리, 과학, 기술, 지질 - 일반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구와 관련되어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주제들. 이런 글쓰기는 주로 ‘자습과제’(project)라는 형식을 취한다. 즉 아이들이 다소간의 지도를 받으며 스스로 탐구할 것으로 기대하며 선생들이 부과한 주제들이다. 이른 시기의 자습
과제는 대개 아이들이 상당한 량의 시각자료를 수집하여 연습장에 붙이거나 그것을 어떤 형태로 조직화하는 형식이다. 글쓰기는 내용에 대한 성질이나 중요성을 지시하는 한두 머리문장에 의해 제한된다. 여기서는 초등 교육의 후기의 자료인, 남부 호주 교육 체제에서 5-7학년에 해당하는 9-12살 아이들의 글을 볼 것이다. 교사가 5학년 아이들에게 그들이 답해야 하고 결국 자습과 글쓰기를 구조화하게 만드는 일련의 질문을 제공한다.
#3 첫 과제는 ‘유럽의 국가’이고 아래에 그 지시사항들이 있다.
[유럽의 국가 - 숙제]
#4 아래는 아이가 과제를 실제 수행한 결과물의 일부이다. 전체에 걸쳐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은 선명하게 전체 텍스트의 통합부분을 이루고 있고 아이의 저작을 완전히 논의하기 위해서 고려되어야 한다. 작자는 9살이다.
[텍스트 28, 서독]
#5 교사의 지도가 아이의 글 모양을 결정짓는 방식은 분명하다. 질문의 대다수는 사실을 나열하는 텍스트로 나아가도록 한정되어 있고 문장들은 관계적이다. 즉 주제/명사는 어떤 記述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들은 be 동사나 have 동사와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이러한 지시의 양식으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다른 절 유형이 나타나고 사람 사이의 형식이 변하고 말의 구조는 스스로를 재주장하게 된다. 교사의 지시들은 장르의 학습과 글쓰기의 발달에 중대한 여러 영향을 끼친다. 아이들은 비서사적인 유형의 텍스트를 만들도록 강요받는다. 위 예에서 그녀(작자)가 바로 이점을 문제로 생각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대다수의 답변들이 나열로 남아 있다. 그러나 교사의 요구에 의해 짜내어진 압력이 아이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그래서 가령 'How the people live' 항목의 6번째 단락은 텍스트 구조 능력의 징후(sign)를 보여주고 있다.
#6 교사의 지시는 아이의 집중도 사실의 범주와 그 표현으로 이끈다. 언어적 특질들 중에서 사실과 ‘이야기’의 구분이 여기서는 문형과 시제로 표시된다. 사실적 문장은 be 동사와 have 동사를 주로 쓰고 현재시제로 표현된다. 비사실적 문장은 다양한 범위의 동사와 과거시제, you 같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형식을 쓴다. 지시 사항들은 상당한 텍스트적인, 궁극으로는 인지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아이들에게 일종의 재촉(prod)이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9 개의 소
챕터의 내용에 대해 제안적이다. 물론 이는 전형적인 과학적‧학술적 글쓰기의 시작이고 여기에서 객관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저자나 실험에 대한 참조는 없을 것을 요구한다.
#7 다음 글은 교사 지도의 효과와(각 소제목을 보라) 실제 쓰여진 갈래적 모델의 효과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이 경우 윗부분의 짧은 역사들이 모델로 작동하고 있다. 이들은 아마추어 역사학자와 시골의 시민들에 의해 [즉 비전문가들에 의해] 기술된 것이다. 더욱이 이 경우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글쓰기를 보여줬다. 즉 그녀는 그 당시 자신에게 삶의 경험과 질이 어떤지를 지시할 수 있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싶어했다. 이는 좋은 대조군이다.
[텍스트 29, Mylor[호주의 도시명. 이후 마일러](숙제)]
#8 이 과제물의 1장은 비개인적 문체의 발달을 분명히 증명한다. 7개의 행위자 없는 피동문이 있다. 이는 전형적으로 비개인적·학술적 글쓰기이다. 개인적 문체는 하나도 없다 - 다른 챕터들에서는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첫문장은 놀랍게도 통사론적으로도 내용의 문체적 정렬이라는 측면에서도 복문이다. 문장은 여전히 조금 서사적(mini-narrative)이나, 서사의 요소는 이제 전체적인 하나를 형성하는 통합에 통사적으로 근접해 있다: 즉 마일러에 대한 언급. ‘서사’의 요소 : (1) 마일러는 1874년에 세워졌다. (2) 왜냐면 당시 금이 Biggs Flat(지명)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3) 원래 명칭은 Gum Flat(지명)이었다. (4) 고무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그러나 이 ‘서사’의 구성 요소들은 더 이상 연쇄적 순서가 아니다; 즉 작자는 자신의 소재(material)를 조직하기 위해서 연쇄가 아닌 방법을 사용했다. 이 순서는 그녀가 ‘서사’의 각 요소에 할당한 상대적 중요성으로부터 도출된다. 텍스트의 나머지 역시 일관성을 제공하기 위해 더 이상 연쇄적 순서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글은 마일러를 전체적으로 조망해준다. 흥미롭게도 그림과 텍스트는 반대 페이지에 위치하고, 매우 도식적이다. 아이가 마음에 품고 있는 개념적 모델은 분명히 博而精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9 2장은 작자에게 분명히 문제거리이다. 그녀는 ‘리스트를 위한 적절한 장르’에 대한 지시를 지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마일러의 최초 정착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단순한 이름의 나열 이상이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것이 어떻게 구성될 수 있고 구성되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3장도 비슷한 문제를 보인다; ‘왜 사람들이 마일러에 왔는
가?’라는 질문은 ‘이야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리스트’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사의 생각은 아마 ‘마일러가 언제 처음으로 세워졌는가?’인 듯 보인다; 즉 그녀(교사)는 아이로부터 비슷한 종류의 답변을 기대했다. 그러나 아이가 정착에 대한 질문에 대해 사건‧행동의 범위의 시각화는 문제없이 해냈던 것에 반해 ‘왜 사람들이 마일러에 왔는가’라는 질문을 위한 질서를 편성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답변은 리스트가 되고, 상관관계가 없는 아이템들이 리스트에 추가된다.
#10 함의된 사실들 : 내용‧함의‧환기사항이 비슷해 보이는 세 질문, ‘언제 마일러는 처음으로 세워졌나?’, ‘누가 최초의 정착자인가?’, ‘왜 사람들은 마일러에 왔는가?’는 아이로부터 상당히 다른 답을 만들어냈다. 회고적으로 보면, 첫 질문은 더 풍부하고 잡다하게 다뤄진다. 다른 질문들은 목록을 이끌어낸다. 능숙한 필자라면 리스트를 가장시킬 수 있겠지만 그것은 리스트보다 좋은 텍스트가 아니게 될 것이다. 교사의 질문이 가이드가 되고 상당정도 결정적이다. ‘서독’ 과제에 대해 교사와 그의 질문은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사는 아이가 장르를 탐험하며 학술적 글쓰기로 이끌고 있다. 잘못이 있다면 장르적 형식에 대한 직접적 교육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교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에 있다. 왜냐면 언어학은 최근에서야 장르의 특성화를 제공하는 일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11 소재를 세워가는 것(building materials)은 형식 상 보다 개인적이다; 행위자가 없는 피동문이 없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명시적이지 않은 they와 you라는 행위자를 사용하기를 아이들은 선호한다. they가 첫 정착자들을 언급하고, 반면 you는 독자를 청자로 언급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you가 더 개인적이다. 5장과 6장도 비슷하다. 이러한 초점에 있어서의 불확실성과 가변성이 장르를 배우는 이런 단계의 특질들이다. 12살이 되면 이는 덜 보인다. 텍스트 12, ‘부리 고래’에는 비록 쪼금 남아 있지만서도 말이다.
#13 텍스트 15는 상상적 글쓰기의 일부인데, 그러한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다. 작자는 그녀를 저자로서의 위치에 세운다. 'The boy I am writing about...' 그리고 그 다음부터 그 소년에 초점을 맞춰 계속 나레이터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잊지 않고 이야기한다. 아이의 글쓰기에서의 문제는 한 주제체 초점을 맞추는 능력이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할일은 토의된 주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그녀가 고도의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글쓰
기 과업에 대한 의식이다.1)
#14 비록 이런 챕터들이 객관적 글쓰기를 향한 발달을 보여주긴 하지만 ‘역사적’이라는 점에서 서사와 많은 밀접함을 지니고 있다. 우선 텍스트는 전체적으로 과거시제이다. 과거시제의 사용은 사건을 특징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미 일어난 것이고, 지금은 일어나고 있지 않고, 결과적으로 일반적이지 않으며, 모든 경우에 그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시제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케이스나 규칙에는 적당하지 않다. 방금 논의된 텍스트에서 아이는 일반성의 성취라는 징후를 보이지만, 그것은 시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반대명사인 they와 you라는 대명사의 사용에 의한 것이다. 즉 어떤 사건은 언제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누구에게나 구분없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일 가능성이 있다. 전자는 소위 보편적 현재 시제의 사용을 요구하고 후자는 가장 일반적 대명사인 you의 사용을 요구한다. 텍스트 12 ‘부리 고래’에서는 현재시제와 you가 모두 쓰였다.
[텍스트 12, 부리 고래]
#15 게다가 수동태가 쓰였다. 이는 일반화와 어울린다. 왜냐면 행위자가 없다는 것은 행위자 간섭이 배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일반화를 위해 세 가지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1) 현재시제, (2) 대명사 you, (3) 행위자 없는 수동태. you가 비록 어른의 과학적 글쓰기 장르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여기서는 전략적으로 매우 적절하다. 그 [발달의] 마지막 형식에서, 이 장르는 자아와 청자와 개별적 세부사항[의 참조]의 완전한 삭제에 이르게 된다. 관심은 대상에만 놓여지고, 그 대상의 특질은 시공간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서 항상 유효한 것으로 제시된다.
#16 이러한 특징들 속에 과학적 글쓰기와 서사적 글쓰기의 차이가 존재한다. ‘개척 소년’[공상적 글쓰기]은 완전한 안티테제를 보여준다: 위의 관점과는 모조리 별개이다.
#17 아이들이 이 장르를 발달시키고 성취하는 것에 대한 인지적 함의는 엄청난 것이다. 자아는 그러한 글쓰기에서 매우 부정되며 (서사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 특히 구어서사는 더욱 그렇지 않다.) 모든 집중은 대상과 대상의 특질에 놓
1)흔히 임상심리학적으로 자의식의 과다는 성격의 발달에 결정적 장애가 된다고 한다. 또한 ‘집중하겠다’는 생각을 의식하는 것은 그 생각에 집중하게 만들어 정작 당면한 집중의 대상에 대하여서는 오히려 집중을 방해한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Erich Fromm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에서 인간의 집중과 자기 성찰의 상관관계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여진다. 장르는 그 자체로 지식의 인간적 생산자를 부정하는 지식의 관점을 부호화하고, 인간적 주체/생산자와는 상관없이 지식을 영원하고 보편적인 범주로 구체화한다. 텍스트 17, ‘조정실’은 그러한 글쓰기의 좋은 예이다.
[텍스트 17, 조정석]
#18 작자는 주요 일반화‧보편화 특질로써 현재시제를 사용한다. 청자에 대한 언급은 없고, 승무원은 대상이다. 사람의 행동은 명사적인 개체가 된다 : designing, controls, routine fling1).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바는, 이 장르의 모든 실제적 요구는 모든 보편화하는 언어적 전략과 형식을 사용할 수 있는가라기보다 이들 중 가능한 얼마나 적은 것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는 점이다.
iii 서사 (narratives)
#1 객관적·과학적 장르의 발달은 극단적인 관점의 발달을 함의한다. 관찰자(viewer) 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글에서 사라진다. 관점의 이러한 경로는 관찰자 없는 기술(텍스트 21, ‘개미’)로부터 관찰자와 청중이 분명히 존재하는 단계와(가령, 마일러 숙제, 텍스트 29 ; The earliest settlers I know of ; I don't know 등) 몇몇 중간 단계(텍스트 12, ‘부리 고래’)를 거쳐 관찰자가 없는 단계로 이끈다. 서사 역시 흥미롭게도 비슷한 경로로 기술된다. 이른 시기의 서사는 나레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텍스트 20(가난한 두 사람)과 22(Father Christmas)에는 외현적인 나레이터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기술할 때 일반적으로 자신이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를 나레이터로 소개한다. (텍스트 44, 고기잡이 여행; 텍스트 8, 가게에 가기; 텍스트 27 ‘레드 로버’) 이런 이야기들(stories)은 필수적으로 단일한 관점을 가진다. ‘가난한 두 사람’에는 보이지 않는 나레이터가 있고 'Red Rover'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나레이터가 존재한다. 이 두 유형은 나레이터가 있고 없고가 문제시 되지 않고 문제도 아니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아이는 나레이터의 역할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있고, 아이인 작자가 관계되는 한 두 유형에서는 나레이터가 없는 것이다. 차이는 화자로서 ‘I’라는 나레이터가 나타날 때, you나 they가 이야기의 화자로 나타날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가난한 두 사람’에는 다른 인물들
1)Erich Fromm(같은 책 및 일련의 저서들)은 산업화가 인간성의 상실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며 그 예로, 서구 사회에서 과학적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의 텍스트들에 피동문과 명사문의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이런 경우에 인간은 사물로 다뤄진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이어서 [나레이터로서] ‘자아’에 의식적 대(對)가 되는 존재로서의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텍스트는 아니다.
#2 관점의 발달에서 나레이터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텍스트 14 'Ayers House로의 여행'은 그런 가능성들을 보여준다.
[텍스트 14 ; Our Trip to Ayers House]
#3 글에서 I라는 나레이터의 사용은 매우 복잡하다. 왜냐면 그녀는 객관적인 we(저자로서의 we를 말함)와 나레이터 I를 구분하고 있다: we all got in the bus ..., I thought... 전체 이야기는, 나레이터이며 독자의 관점이기도 한 I를 통해서 보아진다. 여기에서 작자는 다양한 위치를 취할 수 있다; 그녀 자신의 정신적 과정에 대한 보고자로부터 서사 내의 인물의 말하기(트레이씨의 ‘there it is’)와 Gilbert씨의 요구(Ayers House의 정면을 그려라)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관찰되고 기술되는 대상으로부터 분리하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능력은 인지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런 서사적인 기술들의 상당히 과학적 텍스트의 객관적 글쓰기 기술과 닮아 있다.
#4 타자의 말을 자신의 텍스트에 포합시키는 것은 이 글이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발달이다. 인용 표지를 통해 직접 인용되거나 개념적·통사적으로 작자의 텍스트에 포함된다. 이때 타자성(otherness)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Mrs. Golbert said to sketch the front of Ayers House, Tracey was telling some people that the bus would pass her house. 타자의 말을 동화시키는 능력은 다른 지식을 동화시키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인지적·개념적으로 이런 발달은 실제로 많은 함의와 잠재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는 아이가 타자의 생각이나 인지를 이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용하고 동화시키는 의식적 단계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적·사회적 지식의 증진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5 과학적 글쓰기와 서사적 글쓰기에 존재하는 이른 과정[의 인지적 발달]이 닮아 있다는 것은 너무 확실해서 오히려 간과되는 듯하다. 아이들이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구분한다는 것은, 아이들이 과학적 글쓰기에서 ‘표절’을 두려워한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구분할 수 있다. 과학적 글쓰기는 그것을 매우 엄격하게 요구하지만 서
사는 그렇지 않을 뿐이며, 아이는 각각에 적절하게 대처한다.
#6 텍스트 14는 다른 관점만이 아니라 다른 시점도 보여준다. 나레이터가 존재하고 이야기는 과거시제이다. 종종 과거 속에서 단순 과거와 과거 완료를 구분하여 층을 만들고 있다. ‘삶의 야망’(4장에서 언급된 텍스트)은 미래와 예정도 보여준다.
#7 서사의 주인공과 나레이터의 역할을 구분하기 시작하면 추가적인 복잡성이 도입된다. 애초에 이 둘은 붙어 있었지만, 12~13세에 이르면 분리될 수 있다. 텍스트 30에서 나레이터는 주인공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는 12살이다.
[텍스트 30, 신비한 이야기]
#8 ‘나/주인공’은 진실을 모른다. 하지만 나레이터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선 이를 알아야 한다. 인지적으로 이는 아이가 설명의 층위를 나누어 작업할 수 있음을 함의한다. 이는 또한 메타-층위(meta-level)적 현상을 다룰 수 있음을 함의한다. ‘황금벌판의 삶’, 텍스트 31은 아이가 두 층위를 구분하려다 만든 실수(error)를 통해 같은 현상을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텍스트 31, 황금벌판의 삶]
#9 문장 10, 11, 15는 주인공의 지식이고 16은 분명 나레이터의 지식이다. 문장 17은 아이가 글을 고쳤음을 보여준다. 그는 the를 지웠다. 그는 아마도 'I got up in the morning to see the gold was gone'였을 것이다. 그는 이것이 주인공이 가질 수 없는 지식을 전제하고 함의한다는 것을 깨달아서 to see if the gold was still gone으로 고친다. 물론 이는 여전히 같은 문제를 지닌다. still은 오랜 기간의 행동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10 앞서 말한 대로, 이런 발달의 중요 요소는 (나레이터든 다른 사람이든) 발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아래 글에 포함된 대화는 최고 수준의 발달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희곡 장르로 이어진다. 대화에서 교환되는 생각이나 대립의 발달은 인지적·개념적 함의를 지닌다. 아래는 15세 소녀의 글이다.
[텍스트 32, 대립]
발화에 대해 의식적이며 거리를 둔 자세의 출현은 서사의 발달에서 중요한 측
면의 하나이다. 우선 발화를 문어 텍스트로 들여옴으로써 그것[발화]의 글쓰기에 대한 타자성이 분명해진다. 이는 발화가 직접적으로 들여와진 것으로 그 구조가 문어와 다르기 때문이거나, 간접 발화나 통사적으로 완전히 통합된 발화에서처럼 작자가 발화를 글쓰기같이 만들고 수용하려는 ‘의식적’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립’과 같은 텍스트를 만들 수 있을 때에야 두 형식들과 가능성들은 구분되고 분리된다.
#11 서사의 형식 중 어떤 것의 발달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취 중 하나는 나레이터를 지우는 것이다. 글쓰기는 가상적이고 주관적이지만 그 자체를 사실이거나 객관적인 것으로 제시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아래는 14세 남자 아이가 쓴 글이다.
[텍스트 19, Kingies of the rocks]
#12 나레이터와 청자를 지우기 위해 작자는 몇몇 언어학적 장치를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이때는 대상을 의문의 여지없지 분명하고 자연적으로 존재하고 알려진 것으로 만들려는 일방적 경향이 있다. 영어에서 일반적으로 정관사의 사용은 ‘너나 나나 다 알고 있는 것’임을 전제한다. 이 텍스트에서 작자는 정관사를 독자가 알고 않은 대상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 독자는 그런 지식이 가정될 수 있는 그룹의 일원인 양 다뤄진다. 이런 장치는 독자와 작자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내부인이란 느낌을 주고 연루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13 대명사의 사용도 같은 효과를 준다. 대명사의 사용은 대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을 이미 청자나 작자가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14 분명, 나레이터가 없게 하기 위해서, 부재한 나레이터[작자]는 매우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청자에 대해서도 똑같다. 이는 아이의 서사 발달의 흥미로운 반전을 보여준다. 아이가 처음 글쓰기를 배울 때 나레이터로서의 역할에 대한 자기의식이 매우 옅다. 그래서 텍스트의 표현이 나레이터가 산재한다는 징후가 되는 반면 아이의 관점에서 나레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가 글쓰기를 배웠을 때, 아이들은 완전히 나레이터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텍스트 표면에 나레이터의 존재를 알리는 어떠한 징후가 없다고 해도 아이의 관점에서 나레이터는 산재한다. 청자에 대한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iv 장르의 숙달과 그 인지적·사회적 효과
#1 언어를 배우는 것은 가장 고도로 계발된 규칙 체계 중 하나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생산하는 모든 발화는 기존의 규칙에 근거한다; 발화들의 사용 역시 규칙에 지배된다. 무슨 말이 용납되는 말인지 어디에서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이 규칙들이 제한한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진부한 표현을 배우는 것이다. 장르의 학습도 예외는 아니다. 해당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지식 구성의 방식과 이해의 방식, 지각과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방식의 사회화가 장르를 통해 보여진다. 장르의 학습은 사회에서의 지식의 부호화 및 정보의 조직과 소통의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만약 지식을 전달·조직·부호화·체계화하는 방식이 개인마다 다르면 사회는 지금과 판이할 것이고 비효율적일 것임이 틀림없다. 장르가 제약의 효과를 가지며, 장르는 일종의 관습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관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실제 이 책의 주요 포인트 중 하나는 아이가 계속해서 ‘알고 조직하는 자신의 방식들’을 계발한다는 것이다. - 비록 그런 것이 계발이라기보다는 실수(error)로 받아들여지긴 하지만.
#2 사회는 관습들의 광대한 연결망 위에 놓여 있다. 이 관습들을 떼어서 볼 때는 다의적이지만 어떤 특정한 사회라는 맥락 안에서는 다의적이지 않다. 가령 개인적 언급을 제한하는 과학적 글쓰기 장르는 보다 큰, 과학이라는 사회 구성에 묶인다. 그러면서 광대한 이론적·이념적·기술적·경제적·정치적 분지가 이루어진다. 서구 사회의 과학적 텍스트들이 나름의 언어적 특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인지하면, 장르 교육이 사회적·이념적 효과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허풍이라고 느껴진다면 뉴스 사설, 공문서, 법규, 지시, 광고, 계산서 등의 언어를 주의 깊게 보라. 아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와 가치체계(value-system)에 맞춰 사회화되고 있다. 이 ‘가치체계’는 단지 약하게 장르에 대해 함의를 가진다. 그러나 글쓰기를 배우는 것과 읽기를 배우는 것에서 ‘메시지’는 매우 불변하는 것이어서, 미세하고 외현적이며 항구적으로 [가치체계의 영향은] 뚜렷하게 된다.
#3 장르에 대한 이런 관점은 학교 교육에서 종종 부과되는 창조성에 대한 (외현적·비외현적) 요구를 멈칫하게 만들 것이다. 언어 형식 즉 문법은 주어진다; 문법이 보다 크고 조직되고 통합된 전체를 구성하는 갈래적 형식 역시 주어진다. 어떤 개인도 새 장르를 창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럼 창조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최소 14살까지 관습을 배우는데 소비된다면, 어느 단계에서 창조성이 적절한 요구가 되는가? 관습들의 숙달은 충분해야 하는가?
#4 장르는 이념적·인지적 메시지를 지닌다. 이런 내용이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적법할 것이다. 공문서(official memo)-일종의 장르-는 그 자체로 외현적 메시지와는 다른 특별한 내용을 지닌다; 어떤 조직 안에서 의사소통의 라인에 대해, 권력 관계에 대해, 수신자와 발신자의 조직 내의 위치에 대해서 등 어떤 정보를 담고 있다. 그 장르에 능숙해지기 위해 이런 내용들에 흡수되고 이런 내용들과 관습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장르에 대한 효과적 교육은 효율적으로 개인을 직관적이고 성찰 없는 장르의 사용자로 만들 것이다. 장르와 그 의미는 개인이 장르의 명령대로 하게 될 때 개인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과학자이든, 작가이든, 관료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르는 장르의 능숙한 사용자를 위해 세계를 만들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그것인가? 질문은 학교에서의 언어 교육의 목적, 기능이 무어냐는 더 큰 질문에 묶일 수 있다. 학교 졸업자 가운데 몇이나 언어의 창조적 사용자가 되기를 요구받을 것인가? 몇이나 장르의 창조적 사용자이기를 요구받을 것인가? 누군가는 언어를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부여하기 위해서, 학생들이 곧 맞닥트리게 될 언어와 장르의 다층적인 의미를 보다 잘 이해시켜주기 위해서, 언어 교육의 목적을 보다 겸손하게, 보다 현실적으로, 보다 실용적으로 장르 교육의 목적을 다시 맞출 것이다.
v 자료와 내용
문학 비평에서 장르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그 성과들은 대체로 문학작품에 한정적이다. 그래서 이 번 챕터는 일반론에 대해서밖에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는 ‘장르’라는 용어를 매우 기술적이지 않고 특수하지 않게 사용하였다: ‘글쓰기의 방식’(mode of writing)이 보다 적절한 용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장르가 되는 것들의 초기 버전이고 그렇게 보면 장르를 형성하기 시작한 단계의 것들이다. 나는 그렇게 다루고 있다. 내가 사용하는 ‘문장’이란 용어는 매우 유추적이다. 이른 시기의 문장들은 어른들의 그것과 거의 공통점이 없지만 그럼에도 그 당시에 아이들에겐 분명 문장이다. [참고 서적들 소개가 이어지고 글이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