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의 의미론 공부모임(세미나팀)에서 공부하고 있는 Zeno Vendler의 저서 Linguistics in Philosophy 의 1장을발제한 것입니다. 발제는 쟝이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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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uistics and A Priori
in Linguistics in Philosophy by Zeno vendler
쟝발제
1.1 언어학은 철학에 필요가 없는 것인가
어떤 것의 가능성을 보이는 최선은 실제로 그것을 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들에서 본인은 구조주의 언어학을 다양하게 응용하여 몇 가지 철학적인 결론을 도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은 철학적으로 강하게 도전받고 있다. 특히 후기 비트켄슈타인의 주장에 의해, 즉 옥스포드 학파에게서 일상언어(Ordinary Language)와 관련하여 강하게 도전을 받고 있다.
‘언어를 삶의 도구로 보는 과학적 방법’에 기반한 ‘일상언어 철학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나나 나와 같은 노선을 걷는 사람들이 현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 이해되고 설명될 필요가 있고, 가능하다면 극복될 필요가 있다.
1.2 언어학과 철학은 궁극엔 만나는 것인가
이러한 필요는 적어도 내 생각엔 Willam P. Alston, Jerry A. Fordor, J. J. Katz 등의 연구에 의해서는 충분하게 답해지지 않았다. ‘철학적인 진술들은 선험적이다’라는 주장으로부터 제기되는 어려움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아래는 포더와 카츠의 글이다 : Cavell의 입장은, 그가 단어의 사용에 대해 논할 때, 옥스포드 철학자들이 경험적인 연구를 추구하고 초월적인 논리의 진리를 밝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일상언어 철학의 적절한 이해가 차단된다. 지금까지도 언어학자와 옥스포드 철학자들을 구분하게 하는 것은 주로 초점의 차이이다. 언어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통사, 형태 음소 음운론의 문제에 관계했고 옥스포드 철학자들은 의미의 문제에만 몰입했다. 몇몇 옥스포드 철학자들을 구분해주는 것은 영어화자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난해한 사실을 발견하는 데서 발휘된 뛰어난 솜씨였다. 확인과 미확인의 방법론(methods of confirmation and disconfirmation) 언어학자에서 철학자를 구분해주지도, 혹은 철학자들 자신을 구분해주지도 않는다.
즉, 옥스포드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언어의 특징들을 탐험한 순진한 아마추어 언어학자라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일상언어 철학자들은 그들의 결론에 힙입어 언어학적 사실들을 [언어학자나 세상에] 주곤 한다. 그러나 그 결론들은 언어학의 영역에 들지 않는다 : 그것들은 철학적인 결론들이고 그런 결론을 이끈 저자들은 철학을 하는 것이지 언어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포더와 카츠의 가정이 옳다면, 과학적인 언어학은 언어학적 철학을 대신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Alston은 그런 발달을 정확히 예측한다. : 순수하게 형식적인 방법의 언어분석이 그 자체로 철학자들에게 필요한 결과를 제공하지는 못할지라도, 철학자들이 자신의 방식대로 실험하는 것이 득이 될 부류들을 [그렇지 않은 부류들과] 분리하게 해 줄 것이다. 곧 언어학자들이 형식적인 절차를 통해 발견한 부류의 구분은 중요한 개념적 구분과 평행하고, 그런 형식적인 결과를 보이는 것은 철학자들에게 그러한[=개념적인] 구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의미론이 발전하고 문법론과 함께 구조주의 언어학에 통합된다면 결론의 지위와 방법론에서 [차이가 나는] 두 종류의 연구의 차이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나는 언어학과 철학의 ‘결론의 지위와 방법론’이 같아질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한다. 사실, 철학이 언어학적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그 자료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것일 터지만, 그는 완전히 다른 논리적 지위의 결론을 세워서 이것[언어학적 자료]를 초월한다.
1.3 언어학과 철학의 관계는 대체 무엇인가
포더와 카츠에 의해 재기된, 철학과 언어학의 관계에 대해 다룬 다른 두 제안이 있다. 그 둘은 “언어 철학은 뭐가 잘못인가?(What is Wrong with Philosophy of Language?)”라는 글에서 “언어 철학은 언어학의 철학으로 여겨져야 한다 : 심리학의 철학이나 수학의 철학이나 물리학의 철학 등과 마찬가지 분야로.”라고 제안한다. 만약에 저자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언어철학자로 Carnap 같은 실증주의자나 Ryle 같은 일상언어 철학자들을 계속 언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단지 용어 차원의 제안이다. 결과적으로 그들[Carnap와 Ryle]의 철학에서 잘못된 것은 그들이 실제로 하고 있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행히, 적어도 카츠는 그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언어 철학이 언어의 일반이론에 기초한 개념 지식의 연구라고 제안한다. “그 언어 이론은 모든 자연 언어에 공통되는 언어학적 구조에 대한 사실을 보여주는 구조 언어학적인 이론이다.” 이런 견해에 나는 좀 더 동의하지만 여전히 너무나 편협하다. 왜냐면, 나는 특정 자연 언어의 구조를 보여주는 언어학적 자료도 순수한 철학적 통찰의 풍성한 재료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이고 싶다.
1.4 언어학적 철학은 언어학적인 결과를 도구로 철학적 문제를 다룬다.
언어 철학의 본질에 대한 카츠의 망설임은 그 분야의 최근 연구들에 널리 퍼진 심각한 개념적 혼란상을 보여준다. 그 엄청난 더미들 속에서 구분되는 것들을 골라내는 데 시간을 잠깐 할애하자1). 먼저, 진짜 “언어학의 철학”이 있다. 언어학의 철학은 의미나 동의, 풀어쓰기, 통어, 번역, 그리고 언어학 이론의 증명과 논리적 지위의 연구 같은 언어학의 보편적인 요소들에 대한 철학적인 반추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언어학의 철학은 철학의 한 갈래이다. 이 분야는, 내가 언어학적 철학(linguistic philosophy)이라고 부르는 분야와 매우 다르다. 언어학적 철학의 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에 대해 반추한 것에서 기술에 대한 러쎌의 이론과 Ryle의 정신개념에 대한 작업에까지 널려 있다. 그 밖의 잡동사니인 “언어의 철학”(philosophy of language) 이 나머지 영역에서 유지된다. Whorf의 Language, Thought, Reality나 비트켄슈타인의 Tractatus가 여기에 속할 것이다. 언어학의 과학과 언어학의 철학이 함께 언어의 철학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물리학과 과학 철학이 과거의 우주론적인 사변론을 대다수 대신했던 것처럼. 반면, 언어학적 철학은 언어가 구사되는 방법에 대한 이해가 증가되어야만 도달할 수 있지만서도 결코 언어학+언어학의 철학에 흡수되지는 않는다. 이런 구분의 견지에서, 이 책의 주요 논의는 “언어학적 철학”의 영역이다. [언어학의 철학이나 언어학이나 언어의 철학이 아니다.]
1.5 철학은 언어학에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앞서 언급된 Alston의 글에서 그는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언어학의 결과들이 문법에만 한정되어 왔다고 보는 듯하다. 실제의 상황에 대한 정당한 기술이다. 의미론 이론의 공식화를 향한 최초의 도전이 Paul Ziff와 포더·카츠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의미론적인 자료를 산출할 수 있었던 막대한 경험적인 작업들을 시작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어학이 우리에게 의미론적인 자료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점과 결과적으로 아직 우리가 의미론적 문제에서 직관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은 Ryle이나 Cavell같은 사람이 언어학이 철학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적인 이유가 된다. 왜냐면 결국 그들은 주로 의미의 문제(단어의 의미에 대한 물음)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언어학이 철학에 대해 가지는 상관성에 대한 Cavell과 카츠·포더의 대립에 사용된 표준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Ryle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단어 voluntarily는 누군가의 잘못인 것으로 보이는 행동과 연결해서만 쓰인다고 주장했다. 오스틴은 누군가는 voluntarily하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으로 이를 부정했다. 그러자 Cavell은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 최소한 그 행동에 대해 흐리멍텅한 무엇인가는 분명히 있기 때문에 [잘못인 것으로 보이는 행동과 연결되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끝으로 포더·카츠는 군대에 voluntarily하게 입대할 때는 어떤 흐리멍텅한 것도 없다며 이를 부정했다. 대체 누가 맞는가? 아니, 언어학이 여기에서 뭘 어쩔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 희망사항일 뿐. 최고의 사전도 철학적으로 중요한 단어에 대해서는 매우 나쁘게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당연히 Ryle과 Cavell는 [언어학의 의미론적 연구에 대해] 회의적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것은 언어학의 다른 분야 즉 통사론은 형편이 다르다는 점이다. 지난 10여년 동안의 진보 덕택에 지금 우리는 매우 정교하고 강력한 영어 문법을 가지게 되었다. 그 문법은 완전하고 통일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별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그러므로 만약 언어학이 철학에 유용한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더라도 언어학의 미성숙한 분야인 의미론을 들먹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과연 통사론이 개념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철학자들에게 뭔가 제공하기는 할까? 그렇다. 왜냐면 단어의 의미는 크게 보아, 물론 전체는 아니지만, 통사적 제약들의 한 가지 기능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보기를 들겠다 : 단어의 품사는 그 단어가 문장 구조에서 하는 역할을 가리킨다. 그리고 분명히 그것의 문법적 범주를 아는 것은 그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첫 단계에 해당한다. 그리고 통사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밖의 단어의 의미에 적절한 것들을 알려준다. 이런 것들 중에는 현재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들을 품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훌륭한 언어학적 철학자라고 해도 혼자서는 정확하게 실수하게 된다. 왜냐면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원래는 훌륭한 그들의 직관은 생성주의자와 구조주의자들에 의해 획득될 수 있는 문법적인 직관에 의해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1.6 철학자들의 첫 번째 논증에 대한 비판
의미론의 실제적인 중요함에 대한 단순한 호소가, Ryle, Cavell 같은 사람들이 철학이라는 목장에 언어학을 들이는 것에 대해 거리낌을 느끼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 충분치 않다는 걸 안다. [두 사실은 별개이다]. 그들 역시 주장을 하고, 언어학의 결과가 철학적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없음을 보이는 설득력 있는 것들도 있다. 이런 주장이 건전하다면 내가 아무리 많은 예를 들더라도 어떤 환상 아래서 애쓰고 있는 것일 터이다 : 왜냐면 사실에 반대하는 것은 건전한 논증이 아니듯이 좋은 증거에 반대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2). 그래서 이들의 주장을 살피겠다. Ryle과 Cavell의 논리들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더 많은 일상언어 철학이 주장하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일상언어 철학의] 첫 번째 반대는 엄청난 것이다 : “언어학의 결과는 경험론적 일반화이고 부수적인 사실을 표현한다, 반면 철학적인 진술은 경험론적 일반화가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언떤 언어학적 결과도 철학적 주장에 필적하지 못하고 지지해주지도 못한다.” 이 논증의 첫 전제는 언어학자들도 당연시 여긴다. 촘스키는 다른 경험론적 과학과 언어학의 평행함을 매우 강조한다3). 현대 언어학이 채용한 가설적-귀납적 상부구조가 [둘의] 유사함을 강화시켰다. 철학의 선험적 특질에 대한 두 번째 전제는 어떤 분야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나와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지지된다. 철학의 순수함의 보호를 담당하던 주된 단어들이 이 논쟁을 분명하게 해결하는 데 동원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Cavell에 의하면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모국어 화자의 ‘범주적인 평서문(진술)들(categorical declaratives)’에 기초한 ‘선험(a priori)’이다. R. M. Hare는 비슷한 맥락에서 합성적 선험론을 제안할 유혹에 빠진다. 비트켄슈타인은 자기 자신을 인용하면서, 철학자는 “현상을 직접 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가능성들을 향한다”고 하였다. 그의 통사론은 논리 통사론이고 그의 논리는, Cavell을 인용하자면,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의미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다.” 그가 탐색하고자 했던 문법은 “근본(depth)”-문법이다. “이것이 비트켄슈타인이 문법을 통해 추구한 지식이다 ㅡ 바로 칸트가 초월적이라고 부른 그 지식.” Ryle의 용어로는 : “논리 통사론의 규칙들은 어떤 한 언어나 언어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발화에 속하는 것이다.” 언어학자들이 철학의 영역에 무자비하게 침범하는 것에 대항하여 칸트의 망토 아래 피난처를 만드는 이런 경향은 우리가[언어학적 철학자들이] 驚氣(경기)를 일으킨 유령, 즉 “철학을 위한 언어학”의 너무나 성실한 우승자들의4) 작업으로부터 나온 유령[칸트]을 자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철학적 문제들이 모국어 화자를 인터뷰해서 풀린적이 있는가?
자 [첫 번째] 논증은 유효한가? 아니다. 진짜 관심거리는 ‘전제가 참인데도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Cavell 같은 이가 분명히 현상을 제대로 관찰했음에도 그 논증의 무효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곧 다시 이 점을 언급할 것이다.
1.7 철학자들의 두 번째 논증에 대한 비판
그러기 전에, 두 가지 다른 논증을 언급하겠다. 이 두 논증은 말할 것도 없이 첫 논증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현재의 언어학적 철학의 등장만큼 오랜 것이다. 일상언어 철학자들은 순수하지 않은 철학적 문제가 특정한 언어의 특이성 위에서 다뤄지는 것의 책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했다. 그러나 최근 Tsu-Lin Mei는, P. F Strawson이 “고유명(사) Proper Names”과 “개별사항들 Indivisuals”에서 그의 결론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한 많은 언어학적 이유들이 중국어에는 들어맞지 않음을 보였고, 나도 “동사와 시간 Verbs and Times”라는 내 글의 논증의 일부가 중국어에서는 실현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중국어는 우리들에게 모두 다소 접근하기 어려운데, 좀 더 친숙한 예를 들어 요점을 보이겠다. Ryle이 “마음의 개념 Concept of Mind”에서 논의한 분명한 몇몇의 철학적 결론들은 어떤 결정적인 동사 가령 know, believe, love 같은 것들은 run, study, think 같은 것과는 달리 지속적인 시제를 가질 수 없다고 기술한다. ‘I am studying : I am knowing geometry(x)’ 이런 걸 근거로 철학자들은 행위와 과정을 나타내는 것과 상태와 성질을 나타내는 것을 구분한다. 문제는 이런 구분이 불어나 독어 등의 대다수 인도유럽어에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영어 말고 다른 언어에서 이러한 논증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언어가 모국어도 아니면서.] 영어에서 ‘알다’는 과정이 아닌가? 그런데 대체 이건 철학적으로 어떤 주제인가? 또는 철학적인 주장을 하기에 앞서서 비교학적인 언어학을 해도 되는 것인가? 분명히, Ryle이 “일상 언어”에서 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 “흄의 문제제기는 ‘cause’라는 단어에 대한 것이 아니다 ; 그것은 ‘cause’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Ursache5)의 사용의 문제와 대등하다. 왜냐면 비록 둘이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cause’의 사용은 ‘Ursache’의 사용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 Ryle은 완벽히 두 언어를 공부하지 않고 어떻게 두 어휘의 사용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나? 이는 분명한 오류이다 : cause는 명사이면서 동사이지만 Urasche는 절대 동사는 아니다. 이는 분명한 용법상의 차이이다. 흄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의 ‘cause’의 사용은 거의 일반적인 영어 용법과 관련이 없다. 그에게 의자와 탁상은 목수에 의해 ‘caused되는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this chair is caused by Jones’은 너무나 어색하다. 철학자들은 cause라는 단어를 흄처럼 사용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가? 그렇다면 흄의 견해와 달라선 안된다. 아니면 영어화자의 전체적인 cause의 사용에 관심이 있는가? 그렇다면 막대한 자료를 다루는 경험론적인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아니면 cause와 Ursache의 공통문모를 찾는가? 그들은 이 것들 중 어느 것도 할 의향이 없다. 그들의 결론은 선험a priori ; 그의 통사론은 논리 통사론 ; 그의 문법은 내면 문법임을 명심하라.
1.8 철학자들의 세 번째 논증에 대한 비판
이는 Cavell의 “모국어 화자의 범주적인 진술”을 포함하는 세 번째 논증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Cavell은 후기 비트켄슈타인의 틀과 용어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철학적인 연구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은 다분히 신비론적인 선언이다. 신비론의 껍데기(-_-; 열라 시티컬)를 벗기고 보면 : 철학자는 자신과 혹은 다른 모국어 화자와 논쟁하는, 자신의 언어를 마스터한 모국어 화자이다. 언어를 마스터했다는 것은 진술(범주적 진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증거가 필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 환경에서 we는 ~~이다” 혹은 “we 같은 것을 ~~ 라고 부른다.” “그는 말해지고 의도된 것을 기억함으로써, 혹은 가상의 상황을 상정하고 거기에 대해 스스로 응답함으로써 답변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언어는 우리의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또는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에 대한 어떤 것과 간과했거나 혼란스러워 했던 것들에 대해 우리 스스로에게 일깨워 줄 것이다. Cavell은 비트켄슈타인을 인용한다 : “이 연구를 통해 새로 얻는 것은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일상적인 관점 속에 이미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우리는 원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너와 다르게 말한다는 걸 발견한다면? 그것은 “한 개인은 서로서로에게 수수께끼”라는 통찰을 일깨워주는 발견이다. 즉 우리는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철학의 결과는 스스로에 대한 지식이다 : 아마 서로서로 다른 우리에 대한 지식. 그러면 언어학의 모든 결과들이 내가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나에게 무얼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가? 그것이 나의 혼란을 극복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가? Investigations의 방법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Cavell의 해석은 신념에 차있고 비트켄슈타인의 생각을 잘 전달하고 있다. 나는 비트켄슈타인의 Investigations의 방법론을 과소평가하는 최후의 인물이 될 것이다. [결코 비트켄슈타인의 방법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에 철학적인 추론에서 언어학적 자료의 역할이 정당하게 이해된다면 그 자료가 무효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9 게임이론과 언어게임
철학적인 도구로서의 언어학을 보호하기를 원하는 기본 바탕에 대한 근본적인 고려와 앞서의 세 논증에 대한 반론은 모두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요즘 언어를 게임이나 다른 것들 곧 규칙에 지배를 받는 행동의 형식들에 비교하는 데에서는 일상적이다. Investigations에서 언어게임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추론의 요점은 분명하다. 언어의 사용이 게임을 하는 것처럼, 게임의 참여자들이 고수해야 하지만,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는 특정한 규준들을 전제한다. 곧 그의 행위는 옳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는 인간의 다른 행위의 양상이나 자연의 처리들과는 [틀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규준에서 벗어나도 그것은 인간 행위의 일면이다. 벗어남은 자질의 부족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규준(법칙)이 부족함을 보이는 것이다. 수성의 궤도가 근일점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어기는 것 때문에 우리는 수성을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체스에서 그런식이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 여기서는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규칙이다 ; 언어가 체스와 비슷하다.
나는 이 추론과 관련된 두 가지를 언급하겠다. 우선, 너무 엄격하게 체계가 잡혔고 고도로 정확한 게임이므로 체스는 그리 적절한 예는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는 분명 그렇지 않다. 전문적인 언어학자는 언어 규칙의 유연성과 시간, 지역이라는 변인나 담화, 문체의 변이의 측면에서 보이는 언어의 포용력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 화자가 아무리 자유롭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는 그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여전히 분명하다는 견지에서 언어는 규칙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남는다. 곧 그는 다른 화자가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 그의 말이 [나에게] 이해된다면, 그에게도 이해된다. 느슨한 규칙을 가지는 게임들을 할 때, 참가자들은 선의의 목적-속임수가 아닌 개혁-으로 의외의 전략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에게 같은 자유가 주어진다. 행위에서의 도덕 행위 성립에 대한 칸트의 생각이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는 모든 게임에 범주적인 명령법을 공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 같은 게임에서 다른 사람이 하도록 당신이 허가한 것이라면 뭣이라도 해라. 언어로 치면 : 같은 언어의 다른 화자로부터 받을[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말하라. 그래서 언어의 다양함과 변칙성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규칙을 정식화한다는 생각이 통합적 선험 명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칸트의 경고를 명심해야 한다.
두 번째 언급은 체스 같은 게임과 언어의 극심한 차이에 대한 것이다. 체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체스의 움직임에 포함되지 않지만,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더욱이 체스 게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체스 용어를 쓸 수도 있고 원시적인 말을 이용할 수도 있다 : 일어나는 일에 대한 기술이 게임의 규칙에 의한 개념 틀에 완전히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언어에 대해서는 상황이 다르다. 아무리 사실을 원시적(단순하게)으로 만든다고 해도, 언어를 어떤 상황에서의 소음의 생성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이런 사실들은 그 스스로 틀이 잡히고 똑같이 완벽한 언어로 진술될 것이다 ㅡ 즉 언어를 언어답게 하는 모든 장치와 규칙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언어를 다분히 부수적이라고 여겨도 다른 언어 같은 대체물을 상상해도 ‘여김’과 ‘상상’은 내가 ‘객관적으로’ 보길 바라는 그 틀(matrix)로부터 결정화된 개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언어를 제거하려는 시도, 언어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단순한 사실에 대한 욕망은, Cavell이 말하듯, 초월적인 환상(의 형태)이다.
매우 낮은 수준에서 게임을 볼 수 없는 체스 선수를 상상해봐라. 그는 “다르게 될 수도 있지. 폰이 뒤로 올 수도 있고, 킹이 없이 게임이 끝까지 갈 수도 있고.”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킹’, ‘폰’ 등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체스는 없다.
언어 사용자도 이 체스 선수와 같다. 상황이 더 나쁠 뿐이다; 우리 선수가 그의 정신적인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있어도, 우리가 제약(bond)ㅡ물론 그것은 족쇄가 아닌 마음의 기관(organ)이다ㅡ없이 아무것이나 말하고 아무 것에 대해서나 물어보고 의문을 품는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요컨대 게임의 규칙이 우리에게 부과한 개념 틀을 벗어 던지고도 우리는 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언어에 의해 부과된 개념 틀을 떠날 수는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언어로부터의 지성의] ‘해방’은 없다. 다만 [언어의] 마스터가 바뀔 뿐이다.
1.10 언어에 대한 통합적 선험 판단과 체스
위위 마지막 지적은 우리가 규칙에 지배받는 행위들에 의해 보장받은 특정 전제들을 검증하기 시작하자 느닷없이 나타났다. 만약 체스를 두다가 한 칸에 폰이 두개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둘 중 하나는 상대방에게 전에 먹힌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를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본 체스에서 그런 적이 있었냐?’라고 물어보는 걸로 족할까? 아니다. 게임의 규칙이 주어졌다면 그런 관계[폰 두 개가 한칸에 존재하면 안되는 관계]는 선험적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칸트주의식의 분석적 연결도 아니다 : 체스판의 어떤 주어진 위치도 역사적 자료가 없으면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면]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다. 누구도 그 연결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그 연결을 알면 그럴 수 없다[한 칸에 폰 두개]는 것을 알 것이다. 통합적 선험 판단이라 불릴 수 있는 작은 예가 이것이다. 그 예가 아무리 사소해도 그것이 만드는 질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 어떻게 그런 판단이 가능한가? [라는 판단을 위한 질문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초월적인 근원문제이다. 주어진 예로부터 우리는 답변을 제안할 수 있다. 체스의 규칙은 자연스러운 대상과 절차에 새로운 특성을 지니게 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개체들의 자연스러운 관계는 필수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게임의 규칙에 의해 구성된 개념 틀을 통해 봤듯이 사건의 두 가지 부수적인 역사적인 상태는 필수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분명하게 대개의 게임이나 거의 모든 규칙에 지배받는 행위는 그러한 제안들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 영역은 수학이나 경험의 다양한 측면의 통합을 지배하는 규칙에까지 이른다. 칸트에게 이해란 “규칙의 기능”임을 기억하라.
앞의 지적 사항의 중요성을 보이겠다. 체스를 둘지 말지, 그리고 체스의 용어를 쓸지 말지는 우리의 선택사항이지만, 우리는 언어의 장치들을 마음대로 버릴 수 없고 계속해서 철학적이거나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의문을 던진다. 침묵하는 철학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 “게임”이 따라야 하는 선험적 진리는 사소한 것이 아니고 담화와 모든 개념적 사고ㅡ법칙, 곧 철학자들이 발견하고 공식화하려는 모든 것ㅡ의 피할 수 없는 최우선의 법칙이 될 것이다. “발견”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놀라게 하면 안된다 : 새로운 것의 발견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었지만 고찰할 기회나 필요가 없었던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앞서 언급된 체스의 ‘연결’은 새로운 것인가? 거의 그렇지 않다. 또는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난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러나 누군가 물었던 적이 있다면 알았겠지.” 비슷하게, 해당되는 명제 p 없이, 명제 p가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동사를 옳게 사용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알았던 연결의 깨달음일 뿐인지 알 수 없다. [명제 p가 있다면 알 수 있다?] 아직 철학의 역사가 보여주듯 우리는 길을 잃지 않도록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체스나 언어에서 보이는 모든 선험적 진리가 뚜렷이 인식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당신은 킹과 퀸으로 혼자 남은 킹을 잡을 수 있다. 그것은 선험적 진리이다. 왜인지 알리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체스는 언어에 비하면 매우 엄격하게 체계화되어 있다. 따라서 언어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어떤 진리는 모국어화자에게 안 보이는 것으로 남게 된다고 추론할 수 있다. 언어 규칙과 모국어 화자의 연결의 소원함 때문만이 아니라 그 규칙들 중 상당수는 화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언어에 대한 전문적인 체계 확립자인 언어학자가 제공하는 도움을 환영해야 한다.
1.11 체스와 철학과 언어학
언어학자는 경험론적인 과학자들이고 그의 결과는 부수적인 진술인 반면, 철학자는 선험적인 진리에 관심을 가진다. 나의 첫 반론으로 돌아가자. 이제 그것을 다룰 만하다.
사람들이 아직 체스 게임을 체계화하지 못했다고 가정하자 ; 사람들은 게임을 보면서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배운다. 게임의 규칙을 세움으로써 다른 사람의 노고를 덜기를 원하는 헌신적인 관찰자를 상상해보라. 적당한 수의 게임을 관찰한 후 그는 말할 것이다 : “게임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규칙을 말해 줄 것이다. 이는 분명 경험적인 연구이고 그 결과는 부수적인 진술이다. 왜냐면 그 진술이 규칙일 필연성은 없기 때문이다. 같은 판에서 벌어진 다른 게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경험적 작업은 좀 특이한 것이다. 그 관찰자는 그가 고려할 것에 있어 선택적이어야 한다. 장기 두는 사람의 모든 행동이나, 판 위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두 [그의 관찰에 있어] 유효한 것은 아니다. 우선, 장기 두는 사람들이 말을 잘못 옮길 수가 있다. 이는 금방 수정된다. 뭐가 진짜 게임에 관련된 것인지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관찰자는 장기 두는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실험을 할 수 있다. : “이렇게 할 수 있나?”, “이걸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괜찮아?” 등등. 곧 그는 그들이 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게임에 대해 아는 것에도 호소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결론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사람이 하는 행위에 대한 단순히 경험적인 일반화가 아니다. 장기 두는 사람이 장기에서 수용할만한 동작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체계화 활 것이다. 규칙의 집합은 오직 게임이 진행되어야 하는 방식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게임을 기술한 것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규칙의 몇몇은 부수적이다. 가령 폰은 그들의 원래 위치와 가능한 경로로 정의될 수 있다.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든 이런 식의 움직임과 일치한다면 그것은 폰이다. 그런데 이렇게 폰을 정의하는 것은 부수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체계 확립자가 어떤 ‘폰’도 하나가 다른 것을 잡는 상황이 아니고는 같은 칸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더 이상 부수적인 진술이 아니고 필수적인 진실이다. 폰이니 하는 등의 용어는 체스의 용어이므로 게임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ㅡ곧 구성저인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 틀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틀에서 문제가 되는 제안은 꼭 필요한 진리이다. “체스라는 게임에서”라는 가정의 말은, 한 사람이 마음속에 같은 용어가 다르게 해석되는 다른 게임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잉여적이다. [그럴 리가 있겠나]. 따라서 개념 틀을 형성하는 규칙을 찾는 경험적인 작업과 그 틀 안에서 얻어지는 선험적 상관성을 연구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앞의 것에 의한 결과를 외재적 진술이라고 부르고 뒤에 것에서 추구하는 것을 내재적 진술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제, 둘의 논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외재적 진술인 내재적 진술의 수립에 매우 유효함이 분명하다. 내재적으로 혹은 외재적으로 규칙을 보여주지 않고 그런 진술이 어떻게 진리인 줄 아는가? 말도 안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규칙이 그 자체로 부수적이고 경험적으로 얻어질 수 있다.
1.12 체스와 언어
언어학자의 할일은 우리의 체스 체계화 작업자의 일과 매우 비슷하다. 그도 주어진 언어에 대해 결과적인 사실들을 발견하기 위한 경험적 연구를 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그의 경험적 연구는 독특하게 선택적인 것이 될 것이다. 왜냐면 그가 목적으로 삼는 결과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 그는 모국어 화자가 자신의 언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 옳은 것과 틀린 것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의 발견들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한 민족이 만들어내는 말소리로 된 소음에 대한 거친 일반화가 아니라 규칙들의 집합이다. 그 규칙은 주어진 언어의 수긍 가능한 발화를 설명할 수 있는 명료성·일치성·이해가능성에 대한 방법론적인 요구에 따라 그가 공식화하는 것이다. 다시 역설적인 말을 하면, 그는 규정적인[예측적인] 기술로 끝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규칙에 대한 언급은 결과적인 것으로 남을 것이다 ; 이들이[규칙들이] 어떤 언어의 의미론적·통사론적인 규칙이 되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결국 언어들은 서로 매우 구조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영어에서 쓰이는 to know that p[명제]라는 동사구는 p가 참일 때에만 옳게 쓰인다.”와 같은 진술은 부수적인 사실을 기록한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 구문이 “to believe firmly that p”와 동의라는 언어 게임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 언어학자는 “영어에서 to cause 라는 동사는 몇몇 분명한 예외를 제외하면 순수한 명사를 취할 수 없고 오직 명사화된 문장을 목적으로 취할 수 있다.”라고 결론지을지도 모른다. 이 역시, 의미론보다는 통사론적의 영역에서, 부수적인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언어학자 혹은 철학자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무엇인가를 알 수는 없다.”[결과적 현상인 자료는 사실만을 말한다] 혹은 “그러므로 ‘책상과 의자’, ‘말과 소’는 caused될 수 없고, 반면 ‘혼란이나 혁명’은 그럴 수 있다.” 이런 진리는 결코 부수적이지 않다 : 여기에서 [인용된 말을 한] 화자는 영어라는 언어의 특정한 성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인과율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동사 to know, to cause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그 언어의 개념 틀을 구성하는 규칙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틀 안에서 이야기하면서 그것[틀]에 의해 요구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know나 cause라는 음소배열[체]의 사용에 대한 제약의 차이를 보일 수는 있지만 잘못된 어떤 것을 알거나, ‘말’을 ‘cause’하는 것은 결코 손아귀에 넣을 수 없다.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비숍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다른 규칙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킹과 비숍만으로 하나 남은 킹을 잡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다. 두 진술의 전반부는 실제 우리의 언어나 게임과 다소 다른 언어나 게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후반부는 우리를 우리의 실제 언어나 게임에서 불가능한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체스의 예와 관련하여, 필자는 “체스에서”라는 말을 ‘내적 진술’에 추가하는 것이, 같은 용어의 다른 규칙을 가지는 다른 게임을 배제할 필요가 있지 않다면 잉여적이라고 말했다. 언어의 경우엔 잉여적일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어리석은 것이다. 가령 “영어에서[밑줄 발제자], 잘못된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어에서, 독신자는 결혼하지 않는다.” 같은 것들. [게임과 언어의] 이런 차이의 원인은 알기 쉽다. 킹, 폰, 비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체스를 두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어서, 다른 게임에서 이 이름들이 다른 의미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One cannot know something false”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영어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런 음소배열을 다른 언어의 규칙에 따라 해석할 가능성은 없다. “mistress6)를 가지는 것은 고대 영어로는 존경받을 만하다.”와 같이 말하는 것은 저질의 농담일 뿐이다. 그리고 “History is a science in German(Wissenschaft-자연과학) but not in French(science-학문)”는 더 나쁘다. 이런 것은 단지 혼돈일 뿐이다. 마무리 짓자면, “잘못된 무엇을 알 수 없다.” 같은 진술은 영어에서 혹은 영어에 있어서 진실이 아니다 ; 그것은 절대적이고 범주적으로 진실이다.
1.13 규칙
언급된 반론 두 가지는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형식적인 답을 하는 것은 간단하다.
내가 강조한 것처럼 언어학자은 경험적인 학문이고 그것의 발견인 언어의 규칙들은 결과적인 진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규칙은 규준적이면서 기술적인 기능을 가진다다는 점을 더해야 한다 : 규칙은 옳은 행위를 기술한다. 규칙이 언어의 개념 틀을 구성하는 원리들이 되는 것이 바로 이 규준적인 측면에서이다. 이제 몇몇 철학적 진술들은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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