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론 공부 모임, 2007년 5월 25일, 쟝
요약정리텍스트 : Rudi Keller(Rules and tools, form his homepage)
(이 글은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학 전공의 의미론 세미나에서 본인이 요약정리했던 글임을 밝혀 둡니다.)
1 사회는 언어를 구성하는 규칙에 관계하는 상호의존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구성하는 규칙에 대한 상호의존적 지식에 참여해야 한다. 이 규칙들은 계속되는 흐름 속에 있다;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오래된 것은 구태의연해진다. 이것이 언어변화이다.
이어지는 진술을 통해 나는 언어적 기호가, 크게는 언어 전체가 은유적 의미가 아닌 실제적인 의미에서 ‘도구’(tool)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단어나 언어가 도구인지 묻는 것은 규칙들이 도구인지 묻는 것과 동일하다.
단어들이 도구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매력이 있는가? 둘(단어들과 도구)은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먼저, 둘 다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소용된다. 단어들과 도구들은, Victor Banberg(1993:23)이 말했듯이 “반복되는 문제들에 대한 표준적 해결을 제공한다.” 둘은 유일한 기능들을 달성한다. 그렇지만 둘 사이의 이런 유사점들만으로 언어 혹은 언어적 기호들을 실제의 도구와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2300년 전에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Cratylus)에서 언어는 도구이기 때문에 자의적일 수 없다는 강한 논증을 제시했다. 모든 도구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다른 재봉 옷감이 다른 북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딱 맞는 이름을 필요로 한다(389d)고 플라톤은 말했다.
플라톤의 생각은 실제로 옳다. 도구는 자의적이지 않은 것이 전형이다. 드라이버는 마분지로는 강철로 만드는 것만큼 잘 만들 수 없다. 언어 기호들이 자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 기호들의 적절성이 그 언어 기호들의 구조에 바탕하고 있지 않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Bruder이라는 표현은 형제를 나타낼 때, hermano나 kardes보다 적격이다. 그러나 일반적 의미의 도구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도구가 이루기로 되어 있는 목적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확하게 그 도구의 구조․구성이다.
따라서 언어적 기호들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도구는 아니며, 혹은 자의적이지 않은 도구도 아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전형적 도구들은 완전히 비자의적이다. 먼저 이를 잠깐 살펴보고―좀 더 자세히 보려면 Keller 1998을 참조― 똑같이 중요한 다른 하나를 보겠다.
3 “도구”라는 개념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완전 합리적이다.
특정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어떤 것은 ‘수단’(instrument)이다.
특정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만들어진 것은 ‘도구’이다.
땅위의 돌은 사냥한 동물을 죽이는 데에 쓰일 수 있다. 이 때, 돌은 ‘수단’이 된다. 특정한 타입의 도끼는 사냥감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다. ‘도구’는, 이를테면, 목적론적으로 만들어진다. 이것이 도구를 도구답게 하는 것이다. 이 정의를 받아들이면, 언어적 기호는 이런 의미에서 도구인가? 혹은 언어 전체는 이 정의로 보면 도구인가? 답은 ‘아니다’이다.
자세히 보면, 이 질문은 처음보다 더 까다롭다. 이 질문이 가리고 있는 어려움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영어와 같은 소위 자연언어는 ―명료함을 위해 가정하여― 의사소통에 봉사한다. (이것은 단순화한 것이다. 언어는 기도하고 저주하고 생각하고 세계를 범주화하는 데도 쓰인다.) 영어 혹은 영어의 기호는 의사소통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도구”라는 우리의 정의에 맞는다면 그렇다고[의사소통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짐] 말해야 할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상이한 이름들의 후원 아래[관련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영역들에서], 이 질문은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었다. 가령 19세기에 소위 자연언어가 인간의 창작물인지 아니면 자연적 유기체인지에 대한 열띤 논의가 있었다. (Keller 1994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언어학의 대다수는 유기체설을 선택했다;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는 용어인 “자연언어”는 이 관점의 용어가, 이를테면, 화석화하여 남은 것이다. 이 주제를 지지하기 위해 언어의 변화와 시작의 과정들은 인간과 독립적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게다가, 유기체설은 언어학이 자연과학이라는 우월한 그룹에 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요즘에도 많은 언어학자들이 잘 알고 있다. 이 관점의 두드러진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독일의 언어학자인 August Schleicher를 꼽을 수 있다; 그는 1863(영어판은 1969년)에 “언어는 자연 유기체이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결코 좌우되지 않는다; 이들은 생겨났다가 정해진 규칙에 의해 스스로 발전한다; 이들은 나이가 들고 죽어서 사라진다. 언어들 역시 우리가 ‘삶’이라는 이름 아래 감싸 안는 현상들에 종속된다. 언어에 대한 학문은 곧 자연에 대한 과학이다; 그 방법론은 일반적으로 다른 자연 과학의 방법과 모두 같다”(20f.). 인간의 의지와 독립적으로 생겨나고 발달하는 것들은 위의 정의에 입각하면 도구로 볼 수 없다. 유기체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언어는 인간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베토벤 교향곡, 그리스 신전, 이집트 피라미드”와 다소간 유사하다는 미국의 William Dwight Whitney(1873:301f.)의 언급처럼. 물론 이 관점의 문제는 그 목적론적 함의에 있다. 결국 영어는 신전처럼 지어진 것도 아니고 교향곡처럼 작곡된 것도 아니다. 영어는 북해의 한 섬에 사는 수백만 거주자들이 의사소통을 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요즘, 이런 충돌은 다음과 같은 버전으로 논의된다: 가령, 언어변화나 언어의 특정 상태가 기능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cf. Keller 1997)? 언어가 “목적”을 가지는가? 유명한 네덜란드 언어학자 Simon Dik는 이 테마를 열정적으로 지지한다:
“어떤 언어적 디자인 혹은 변화의 특성이 기능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특성에 대한 기능적 설명을 아직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1986:11). 다른 한편으로, Roger Lass는 똑같이 열정적인 반-기능주의자이다: “‘기능적 변화의 이론’ 은 […] 거의 모든 것이 [기능주의를] 지지하는 예가 되고 어떤 것도 반례가 안되도록 만들어졌다”(1980:71). Lass에 따르면, [언어] 발달의 방향은 그것의 목적(목표)인 양 회고적으로 재해석된다. “이는 ‘목적’을 공허한 개념으로 만든다: 목적은 그냥 결과로 이끈 연쇄의끝에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 허무하게 만드는 오류는 Post hoc ergo propter hoc이다.”(1980.80). 반-기능주의자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유기체론자들이 언어나 언어 표현들이 ‘도구’라는 사실을 분별없이 거부하듯이 기능주의자들은 분별없이 지지할 것이다. 다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할 수 있다: 누가 옳은가? 기능주의자들의 논의를 시작점으로 삼아 답을 해보겠다. 가령 자연언어가 도구이냐는 질문이나 어떤 의미에서 자연언어가 도구인가라는 질문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언어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질문을 명확하게 하는 것과 같다.
4 소위 자연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든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 존재 목적이 ―도구와 같이― 내재적인지 아닌지는 시작부터 서양 철학의 병폐를 지니고 있는 문제제기이다: 곧, 이분법적 사고. 서양에선 ‘자연’과 ‘인공’ 이라는 선택 사항 사이에 경계가 그어져야한다고 믿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다. 이들은 제 3의 현상이라는 큰 부류의 존재를 보지 못한다. 자연 현상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즉 자연은 인간 행위의 결과가 아니다; 도구는 반대로 다른 모든 인공물과 같이 인간 행위의 결과물이고 인간이 의도한 목적․목표이다. 도구들은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니 소위 자연언어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연언어는 Friedrich August von Hayek이 기술하고 있듯이 “생물학과 비슷하다. 생물학에서는 유기체의 ‘목적’ 혹은 기능이 습관적으로 말해진다. 물론 생물학자들은 그것이 문자적 의미대로는 사실이 아니고 그러한 표현은 어떤 종류의 위험을 내포한다는 걸 알고 있다”(1956.513). 자연과 인공의 이분법에 갇힌 사람들은 ―인공물처럼― 인간 행위의 결과이지만 ―자연 현상처럼― 인간이 의도한 목표는 아닌 광범위하게 분포한 현상을 간과한다. 이들은 인간 행위의 부수물로서 도덕률, 교통체증, 오염, beaten path 등이 해당하고 ― 그리고 자연언어도 정확하게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Adam Ferguson이 1767년에 “실제로 인간 행위의 결과이지만 어떤 인간 의도의 실행도 아닌 구조체”(205)라고 딱꼬집어 표현한 현상들의 부류에 속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수용된 용어가 없어서 나는 이들을 “제 3의 현상(phenomena of the third kind)”라고 불러왔다(Keller 1994). 우리의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반대로 언어는 의사소통의 결과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언어들은 수천 세대 동안에 걸친 수백만 개인들의 의사소통을 위한 노력에 의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모든 개인은 의사소통을 시도하면서 단 한 가지만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의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의사소통의 의도’의 실현. 이런 방식으로 그는 규칙과 구조의 창발(emergence)에 기여한다. 예를 들어, 영어의 thou와 you의 구분이 일반화되어 you로 변한 것은 어느 특정 시기엔가 가능한 한 가장 공손한 말의 형태를 고르려는 일반적 경향성의 의도되지 않은 결과이다. 이런 전력의 결과는 근대 영어에서 대화 상대자를 표현하는 대명사의 형태를 이용하여 공손한 의도를 표현하는 것이 폐어화되는 것이다. 이 작은 예는 “왜 영어 화자는 thou-you 체계를 you 체계로 대체하는가?”라고 묻는 것이 잘못임을 분명히 밝혀준다. 새 규칙의 창발은 대화 상대자에 대한 무례한 표현을 피하려는 화자의 시행착오적 시도의 부수적 결과이다. 게다가 이는 영어 화자가 대화 상대자에 대한 대명사 형태를 선택할 때 지위의 구분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유쾌한 민주적 부작용도 동반한다.
영어 화자가 대화 상대자에 대한 어형의 체계를 바꾸어서 청자의 지위를 구분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인가? 분명히 아니다. 내가 여기서 한 설명이 기능적 설명인가? 목적론적인 의미에서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보다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잠깐 단어기능(wordfunction)의 가능한 의미들에 대해 고려해보아야 한다.
1. 기린 목의 길이는 기린이 키 큰 나뭇잎을 먹고 산다는 사실의 한 기능이다.
2. 기린 목의 기능은 키 큰 나뭇잎에 다다르는 것이다.
명제1은 완전하게 수용가능하고 아마도 옳을 것이다. 반면 명제2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명제2는 목적론적으로 오염되었다: 기린의 목은 키 큰 나무에 다다르기 위해 가능한 한 긴 것이 아니다. 도리어 긴 목을 가진 개인들이 번식에서 보다 높은 평균 비율을 가졌고 이 특성을 그들의 자손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 두 명제는 단어기능이 최소한 다른 두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둘을 각각 논리-수학적 독법과 목적론적 독법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의 설명은 논리-수학적 독법으로는 기능적이지만 목적론적 독법에서는 기능적이지 않다. 아래의 두 언어학적 명제를 비교해 보자.
1' thou-you 체계가 you 체계로 바뀐 것은 화자의 무례를 피하려는 시도의 기능이다.
2' thou-you체계가 you체계로 바뀐 것은 지위의 구분이 청자를 나타내는 형태를 고를 때 무시되어도 되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
첫 번째 주장이 받아들일 만하고 아마도 사실일 것인 반면, 두 번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목적론적 해석의 편에 서 있다. 먼저 잠정적으로 두 가지 경계(cautionary)의 원칙들을 공식화 할 수 있다.
1. 화자에 대한 명제와 화자의 언어 사용 방식에 대한 명제를 분명히 구분해야 하고, 언어에 대한 명제들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2. 단어 기능의 목적론적 의미와 논리-수학적 의미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화자가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옳지만 언어가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옳지 않다. 변화―그리고 결과상태―가 사용의 한 기능이라는 주장은 옳지만 변화가 기능을 가진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화자가 그들의 언어를 기능적으로 사용한다는 것, 곧 목적을 가지고 사용한다는 주장은 옳지만, 언어가 기능을 가진다는 주장은 의문스럽다. 기능주의자들이 첫 번째 주장들 모두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들은 옳다. 반-기능주의자들은 두 번째 주장들을 비평하는 데 충고가 된다. 언어가 기능을 가진다는 주장을 의문스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린의 목의 기능에 대한 명제를 오해하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특징들, 곧 기능은 미리 알 수 없는 진화 과정의 결과일 뿐, 발생하는 과정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문의 마지막 절에서는 이 문제를 살피겠다.
5 언어와 기린의 목은 진화 과정의 결과이다. 여기서 생물학적 진화와 사회문화적 진화의 체계적 차이에 대해 세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Keller(1994)에서 이미 했다. 지금은 이들의 유사점을 집중적으로 볼 것이다. 진화 과정은 다음의 네 요소로 특징지워진다.
1. 목적론적이 아니다.
2. 변이와 선택의 상호 작용에 기초한다.
3. 누적적이다.
4. 수용적이다.
이러한 현상들의 기능에 대한 주장들을 문제적으로 만드는 것은 진화 과정은 목적론적이지 않다는 첫 번째 요소이다. 마지막 요소인 진화 과정의 수용성은 이런 현상을 사후적(post festum, 事後) 기능성에 스며들게 한다. 기능성은 시도되지 않고도 습득된다.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점에서 도구라는 유추가 언어에 적합한가? 그리고 어떤 점에서 그렇지 않은가?
1. 언어적 기호는 자의적이지만 도구는 그렇지 않다.
2. 도구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지지만 언어적 기호는 (보통) 그렇지 않다.
3. 도구는 내재적 목적론을 가지고 있지만 언어적 기호는 그렇지 않다.
3번은 좀 더 설명을 요한다. 어떤 경우 도구도 수용적 과정을 겪는다. 가령 쟁기는 수천년이라는 역사를 거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최적화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한 차이는 있다. 쟁기는 어쨌거나 쟁기로 남았다는 것이다. 그것의 기능은 변하지 않는다; 모양이 단지 그것의 기능을 완수하기에 더 적합하게 변했을 뿐이다. 쟁기는 단지 더 좋은 쟁기가 된 것이다. 반면, 언어적 기호는 시간이 지나면서 쓸모가 없어질 수도 있다. 영어의 thou처럼 말이다. 혹은 언어적 기호는 그 기능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 고대 영어 명tk while(‘time’)은 현대어에서는 접속사이다. 따라서 도구의 발달이 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에 반해 언어는 전체적으로든 특정 어형이든 기능적으로 최적화하는 특정한 흐름을 따른다.
언어적 기호와 도구 사이에 존재하는 이 세 가지 핵심적인 차이는 이들이 공유하는 것에 의해 두드러진다: 둘은 모두 각각의 문화 속에서 이들의 기능적 적합성의 정도에 따라 존재하고 잔존하게 된다. 둘은 모두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표준적 해결책을 공급한다. 이로부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언어 혹은 언어적 기호가 도구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에 관해 결론 내리게 하는가? 언어(혹은 언어적 도구)를 도구라고 부르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이 매우 특별한 종류의 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답변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광범위한 주장을 하려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언어에 일종의 돈의 부류에 해당하는 도구 혹은 카드놀이 부류에 해당하는 도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를 설명하는 것]는 별도의 논문을 요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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