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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zing/Charls Darwin

학자의 자세

by 앎의나무 2009. 1. 7.
Charls Darwin(찰스 다윈, 1809∼1882)은 링컨과 더불어 인류의 인권의 신장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꼽힌다. 링컨은 인종차별을 폐지했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종차별의 무의미함을 함의한다. 인간은 진화의 한 가지일 뿐이며 이 점에서 다른 종들보다 귀해야할 이유가 없다.

열정
그는 『종의 기원』을 쓰기에 앞서 37세부터 8년간 바다 갑각류 중 하나인 따개비를 조사하고 분류했다. 무려 1만 개의 서로 다른 변이들을 연구하고 기록했다. 
화학·식물학·지질학을 공부하고 영국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4년9개월간 남미·태평양 등을 항해했다. 영국으로 돌아와 『비글호 항해기』를 출판한 뒤 18년 동안 진화론을 입증할 증거와 자료들을 축적했다. 대학자의 명성을 쌓은 뒤에도 학문에 대한 몰입은 계속됐다. 1878∼79년 그는 덩굴식물에 대한 연구를 확대해 『식물의 운동성』(글 400쪽, 그림 200쪽)이라는 방대한 책을 완성했다. 말년에는 벌레를 연구하느라 스스로 ‘벌레의 영혼’을 가질 만큼 몰입했다. 『벌레의 습관과 행동을 통한 옥토 형성』은 다윈이 일곱 살에 가졌을 경이감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음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그는 40여 년간 병명도 모른 채 몸이 쇠약해지는 끔찍한 병을 안고 살았다. 아들과 딸을 잃는 고통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2~3년에 한 번 새 저서를 내놓는 정열을 과시했다.


도전정신
다윈은 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걸 즐겼다.대학 졸업 전 그는 테네리페 섬(모로코 근해 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을 원정할 계획을 세웠으나 선박 사정이 나빠 포기했다. 그 대신 북웨일스 지방의 거칠고 황량한 산악 지역을 누비고 다니면서 지질학의 실전 경험을 쌓았다.

개방성
다윈은 자연사를 공부했지만 생물학·지질학·동물학을 아우르는 생태학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그 원동력은 끊임없는 독서와 관찰이었다. 대학 시절 읽은 토머스 맬서스의『인구론』은 생존 경쟁을 위한 진화 개념의 단초를 제공했다. ‘자연선택’ ‘적자생존’ 같은 단어들이 만들어졌다. 다윈은 갈라파고스의 생태계에서 종(種)들이 생존을 위해 정교하고 다양하게 적응하는 현장을 발견했다. 탐험가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쓴『남아메리카 여행기』는 비글호 항해 참가를 추동하는 동력을 제공했다. 천문학자 존 허셜의 『자연철학 연구에 대한 기초 논문』,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 역시 진화론의 자양분을 제공했다.
다윈은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진화론을 발견한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를 린네 학회에서 진화론의 ‘공동 발표자’로 내세웠다. 월리스가 다윈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와 논문은 자신이 20여 년간 구상하던 『종의 기원』을 출간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타인의 시선에 굴하지 않는 용기
진화론 발표 이후 다윈의 오랜 친구들은 등을 돌렸다. 그는 진화론을 입증하는 저작들을 잇따라 내놓았다. 사랑하는 아내의 독실한 신앙심을 배려해 ‘인간 진화’는 맨 나중에 발표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진화론 때문에 등을 돌린 친구에겐 친분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네트워크 경계성
다윈은 연구 활동을 위해 보이지 않는 자원과 인맥을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1846년 10월 따개비 연구를 시작했을 때 세계 각지의 과학자들에게 관련 자료를 의뢰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자 다윈의 집 앞에는 각종 희귀한 샘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재배 식물의 변이에 관해 의문이 있으면 정원사나 농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야생동물에 대해선 사냥꾼이나 개 주인에게까지 질문을 퍼부었다.
 비글호 탐험 기간 중 그는 런던의 친구들과 공유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그런 네트워크 덕택에 비글호 항해를 끝내면서 그는 동물학·지질학과 관련한 1700페이지의 기록, 4000개의 동물 가죽·뼈, 알코올 병에 보관한 1500개의 표본을 건졌다. 진화론을 둘러싼 대치 전선에선 찰스 라이엘(지질학자), 토머스 헉슬리(생물학자) 같은 원군이 활약했다. 그 결과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란 별명까지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