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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zing/Maturana and Varela

삶은 앎이고 앎은 삶이다.

by 앎의나무 2008. 7. 30.

한 체계의 내적인 작동 동학과 그 체계 전체로서의 개체의 상호작용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때, 비행기나 잠수함의 조종사를 예로 들 수 있다. 비행기 외부에서 일어난 것은 비행기 안의 작동적인 동학과 관계가 없으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종사들에게 지식의 한계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관찰자만이 한계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찰자 자신의 영역과 동시에 조종실의 내적인 작동 동학의 영역에도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중보를 사용해야 하고, 조종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과 외부 세계의 상황들을 비교해서 서로 다른 두 영역에서 본 것을 그들 자신에 의해 생성된 또 다른 영역 속에서 관련시켜야 한다. 관찰자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 이중보기의 결과이다.

 

관찰자들은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오직 자신들이 어떤 객관적인 실재들을 믿고 있는 실재론자들이라고 선언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알기의 한계들을 설정할 수 있고 지식의 한계를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찰자들이 비교의 한 기준으로 삼는 세계는 실재 세계가 아닌 그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일 뿐이다.

 

신경 체계가 전적으로 폐쇄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 폐쇄된, 즉 숨겨진] 인지 과정들에 대해 이해하고 서술할 수 있는가? 그것은 특정 영역에서의 적절한 행위를 관찰한 것이다. 인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설명도 아니고 환경의 조건들에 따라 계산하는 과정도 아니다. 동물이나 인간이 적절하게 행동하고 그 상황과 긴밀히 연관될 때, 그리고 관찰자들이 그 관찰 상황에 적절한 행위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 이 관찰자들은 그 관찰 대상인 동물과 인간이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인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즉 지식이란 특정 영역에서의 (관찰자들에 의해 적절하다고 판단된) 행위이다. [내가 나의 행동을 관찰하고 지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것을 인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더 나은 이해에 다다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관찰자들은 관찰자 자신들이 행위의 적절성을 규명하는 방식 그대로 유기체들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해석한다. 그리고 관찰자들은 바로 관찰된 체계들의 행동의 적절성과 적합성을 근거로 그 체계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행동들이 인지적 작용을 함축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지식의 표현이고, 존재 영역에서의 적절한 행위의 표현이다.

[삶, 즉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지식, 즉 앎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앎은 삶을 적절하게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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