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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uistics/No royal way

[고대대학원신문_142] 공부론_누가 글을 잉크로 쓰는가, 피로 써라

by 앎의나무 2008. 3. 16.

누가 글을 잉크로 쓰는가, 피로 써라
공부론



공부를 잘 하는 법, 이른바 공부법이라, 이 비결을 알려달라는 요구에 답하기 전에, 사실 내가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지만, 그냥 허허벌판에 나가서 쏟아지는 소낙비를 흠뻑 맞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면 광산의 막장으로 가서 매캐한 공기 속에서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곡괭이질을 해보던가. 그냥,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보라고 하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그 첫 번째 편지 중 “당신은 당신의 눈길을 외부로만 향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그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충고하고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겐 단 한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라는 대목은 글을 쓰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학문을 하는 자세로 보아도 무방하다. 릴케는 인생 고민을 물어온 젊은 청년에게 “당신의 생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언어에 대한 자신만의 개념 설정이 필요


내가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므로 그 입장에서 지금까지 공부를 해오면서 정말 강하게 느꼈던 몇 가지만 들려주는 게 이 지면을 아끼는 일이 될 터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에 대한 스스로의 개념 설정이다. 어떤 글이나 논문을 보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왜 그 글을 쓰는지 이유를 모른다면 당장 거기서 손을 떼는 게 낫다. 애매한 나무 몇 그루 더 죽이지 말고. 운동경기에 비유하자면 자신이 높이뛰기 선수인지 마라톤선수인지 아니면 배구선수인지 모르는 경우이다.


왜 그런 결과가 오는가. 그것은 바로 언어에 대한 개념설정의 결여에서 연유한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가슴에 와 닿지 않은 글은 아무런 감동도 느낌도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우선 낱말 하나하나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운용이 관건이 될 것이다. 이것을 외국어에 적용하면 어느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가슴으로, 머리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외국어로 옮길 때도 해당한다. 원문으로 읽었을 땐 무슨 뜻인지 대략 알겠는데 우리말로 옮겨놓고 보니 영 아니더라. 껍질만 옮겼으니 알맹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국어로 자신의 생각을 적을 때, 막연하게 아는 낱말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던진 돌멩이가 어디에 가서 떨어질지 모르고 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사전을 의심하라


이것의 극복방법은? 사전을 의심하라. 외국어 사전의 경우 잘못 번역된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에 자신만의 경험으로 빨간 글씨로 새롭게, 그리고 정확하게 그 낱말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에 어느 낱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어떻게 구사해야 하는지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물론 텍스트를 제대로 읽어내고 또 글을 쓰는 일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텍스트들을 두고 대개 아마 황당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서양학문은---동양학문도 마찬가지이겠지만---일체 개념의 고리이다. 그런 개념들이 제대로 파악되고 또 번역되지 않았는데 무슨 이해가 가능하겠는가. 개념들 간의 아귀가 맞지 않으면 그 번역문은 서너 페이지를 넘어가면서 우리의 이해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일쑤다. 일단 어느 개념이 어느 텍스트에서 부정적인 쪽에서 쓰였는지, 아니면 긍정적인 쪽에서 사용된 것인지 파악해내야 한다. 개념의 색깔에 대한 구별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또한 한 가지 낱말은 이웃한 낱말들의 영향을 받으므로 맥락적 이해 또한 필수이다. 이 때문에 아마도 학문의 길 초창기에는 많이 읽는 것보다는 어느 중요한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읽기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독일어 원문과 함께 한글 번역문 그리고 영어 번역문을 함께 보는 것이 좋다. 자신이 이 세상의 첫 사람인 듯 의기양양하게 앞서간 선배들의 것을 그냥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원시인처럼 집을 처음 지으려 하는 것과 같다. 받아들일만한 것, 특히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앞의 선배가 어떤 허점을 보였는지 파악하는 것이 제대로 된 학문적 자세이다. 그것이 학문의 개혁이 될 것이고 학문적 증축이 될 것이다.


논문이란 읽는 이를 설득시키는 일


논문이란 그것을 읽는 사람을 설득시키는 일이다. 자연과학 논문이나 인문과학 논문이나 지향하는 바는 같다. 자연과학 논문이 어떤 가설을 세워놓고 그것을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여 보인다면 인문과학 논문은,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견해를 실질적으로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일상의 모든 이야기를 동원하고 있듯이 그것을 여러 가지 증거나 자료의 제시, 논리를 가지고 행한다. 논문심사를 하다 보면 거듭 마주치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첫째는 대상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것의 필연적인 결과로 서술이 갈지자로 걷는다는 것이다. 원문 텍스트를 제대로 심도 있게 분석하지 않고 다른 이론가들의 견해만 나열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외국문학을 전공하는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차라리 어느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느끼고 당했던 고통, 그 고뇌의 과정을 기술하는 것이 그 텍스트를 훨씬 제대로 읽었다고 하겠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고유한 노래를 부르려면 텍스트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허허벌판에 나가서 선배들의 모든 학문적 업적의 소나기를 흠뻑 맞고, 이어서 자신의 곡괭이로 자신만의 학문의 갱도를 파 들어가야 한다. 인문학의 길로 들어선 사람은 마라톤 선수이다. 목표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구간별 기록에 신경을 써가며 묵묵히 달려갈 뿐이다. 무수한 생각의 고리를 잡으며. 누가 글을 잉크로 쓰는가, 피로 써라.


김재혁.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