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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izing/Small is beautiful

<작은 것이 아름답다>, 슈마허 #1

by 앎의나무 2006. 8. 14.

평화와 영속성


시장 공간에서는 개인과 사회에 대해 아주 중요한 질적 구별이 실용적인 이유로 억제된다. 그래서 그 구별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장’에서는 양이 위대한 승리를 누리면서 지배한다. 모든 것이 동질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동질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가격을 부여해서 교환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사고방식이 시장에 의존하는 만큼, 생명으로부터 신성함은 사라진다. 가격을 갖는 것에는 신성함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사고방식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 아름다움, 건강, 깨끗함 따위의 비경제적인 가치조차 ‘경제적인’ 것으로 입증되는 경우에만 살아남을 수 있는데 ···


경제학자는 비경제적인 가치를 경제적 계산 영역에 끼워 넣기 위해 비용/편익 분석법을 사용한다. 이 방법은 그렇지 않았으면 완전히 무시되었을 수도 있는 비용과 편익을 고려하려는 시도이므로, 흔히 선진 기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고차원적인 것을 저차적인 것으로 끌어내리고,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에 가격을 부여하려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상황을 명확히 보여주면서 이성적인 결정을 도출하도록 도와주는 게 결코 아니다.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자신이나 타인을 기만하는 일뿐이다. 왜냐하면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려는 시도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며 선입견으로부터 뻔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정교한 방법만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란 고작 측정할 수 없는 비용과 편익에 적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비합리성이 이 방법의 최대 결점인 것은 아니다. 더욱 나쁜 것은 문명을 파괴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가격을 갖는다는, 즉 돈이 최고의 가치라는 주장이다.


경제학은 ‘일정한’ 틀 내부에서만 정당하면서도 유용하게 작동하는데, 이 틀은 완전히 경제적 계산 영역 외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언어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제학이 제 발로 서 있는 학문이 아니라거나 ‘파생된’ 사유체계, 즉 메타경제학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메타경제학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아니 더 나쁘게 말해서 경제적 계산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에 한계가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는 성서를 인용해서 물리학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중세의 몇몇 신학자들과 비슷한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학문이든 고유영역에서는 유용하지만, 이 영역을 벗어나면 곧바로 악이 되고 파괴적인 것이 된다.


메타경제학이란 무엇일까? 경제학이 주변 환경 속에 있는 인간을 취급하는 한, 우리는 메타경제학이 두 가지 부분, 즉 인간을 다루는 부분과 환경을 다루는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경제학은 그것의 목적과 목표를 인간에 대한 연구로부터 끄집어내야 하며, 적어도 방법론의 주요 부분을 자연에 대한 연구로부터 도출해야 한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언어학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기능주의 문법인 인지문법이나 생태언어학 경제언어학 등이 메타언어학적인 입장을 반영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