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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zing/Finding Flow_칙센트미하이

사회 관계

by 앎의나무 2009. 7. 24.
[사회의 필수불가결성]

우리가 평상시 하는 행동 중에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타인과의 교제이다. 몰입 경험을 하다가 다음 순간에 냉담, 불안, 이완, 권태가 찾아오는 수가 많다. 단 하루 동안에도 우리는 타인에 대한 평가와 교제의 양상이 수시로 바뀌며 그것이 감정에 여지 없이 반영된다.

사회화는 행동의 틀을 잡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의 기대나 요구에 맞게끔 사람의 의식을 조형한다.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사회화의 결과이다. 내면화한 공동체의 기대 주순에 개인이 얼마나 깊이 의존하는가는 문화마다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정신적으로건 육체적으로건 왜 우리가 사회적 환경에 이토록 얽매여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3단계 진화의 결과 - 앎의나무] 

마음의 균형을 잡는 데 남들과의 어울림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타인이 우리에게어떤 영향으르 미치는지를 직시하고, 그 영향으르 어떻게 하면 긍정적 경험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1. 우리의 목표와 다른 사람의 목표 사이에서 어떤 합치점을 찾아야 한다. 
2. 다른 사람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상적 친구와 현실적 유형]

친구와 나 사이에 합치점이 있고 평등한 관계이기에 친구가 된다. 우정은 서로에게 득을 준다. 이상적 우정은 결코 한 자리에 고여 있지 않다. 늘 새로이 정서적, 지적 자극을 주어 권태나 무감각이 스며들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 새로운 대상, 활동, 모험을 추구하고 새로운 태도, 관념, 가치를 개발하면서 친구에 대허 더 깊이 알게 된다. 많은 경우 몰입 경험이 오래 가지못하는 것은 활동의 내용이 금방 시시해지기 때문이지만, 친구는 일평생을 가도 끊임없이 자극을 줄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정서적 지적 기량을 갈고 닦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이런 이상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 10대 동년배 집단, 클럽이나 다방에서 잡담으로 소일을 하는 이들, 직업으로 얽힌 상조회, 술친구들은 이렇다 할 부담을 주지 않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는 위안감을 준다. 이런 친구들과 있으면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자아상을 담아두기만 하는 고치의 역할을 하는 우정이다.

파괴적인 우정도 있다. 달리 깊이 사귈 만한 대상이 없는 사람이 자기처럼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할 때 나타난다. 깡패조직, 폭력 조직, 테러리스트.


[현대 사회와 우정]

우정은 가깝게는 가장 정서적 보상이 큰 상황을 제공하고, 멀게는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가져다준다. 그러나 현대인의 생활은 우정을 지켜나가는 데 불리한 쪽으로 작용한다. 이동이 많아서 깊은 사귐이 어렵다. 나이가들수록 친구와의 사귐이 일시적이고 피상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현대사회와 섹스]

또 하나 자주 듣는 이야기는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20세기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의 하나가 바로 삶에서 좋은 섹스의 중요성을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부풀려진 경향이 있다. 섹스가 삶의 나머지 경험으로부터 유리되면서 사람들은 성의 자유로운 만끽을 통하여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그릇된 관념에 빠지게 되었다.

진화론에서는 성행위의 본래 목적이 아이를 낳고 부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 있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기능이 성행위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미각의 일차 기능이 신선한 음식과 부패한 음식을 구별하는 것이지만, 인류는 맛의 섬세한 차이에 바탕을 둔 식문화를 발달시켜 왔다. 마찬가지로 성적 쾌락은 유래가 무엇이었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언제든지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허기와 관계없이 폭식이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애정, 관심, 일체감 없는 성행위는 부자연스럽다.

에로스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악용되고 있다. 성을 억압하거나, 성욕의 발산을 권장하거나, 어느 경우든 삶의 가장 깊고 내밀한 희열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이 바깥 세계의 이익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

지금 문제가 무엇인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의 성으르 지배하려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얼마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하루 빨리 깨달을 수 있다. 아주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금욕도 방종도 결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삶의 틀'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가지는 것이며, 그 틀 안에서 성이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가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가정과 개인]

인류학적 발견이나 사회심리학적 연구들의 성과로 보아 고정 불변의 이상적 가족상이 존재하며 사회적 조건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이런 호나상을 고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느느 것은 정직하지 못한 자세다. 그렇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모만이 줄 수 있는 정서적 뒷받침과 보살핌 없이도 한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위험한 논리이다. 가정의 형태가 아무리 변화무쌍하게 펼쳐져 왔다고 해도, 성이 다른 두 어른이 결합하여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자식에 대해 책임을 함께 나누어 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식구 하나하나의 정서적 안정과 성장을 뒷받침하는 가정에는 두 개의 거의 상반된 특성이 공존한다. 그것은 '원칙과 자발성', '규율과 자유', '높은 기대와 무조건적 사랑'의 공존이다. 허용 가능한 것과 허용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하느라 불필요하게 기운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원칙과 규율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식구들은 필요할 때 가족 전체로부터 정신적 후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공동체와 외로움과 개인]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사람도 문제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적은 사람도 문제가 있다. 하루 일과가 꽉 짜여져 있어 심리적 무질서를 낳는 기운이 사람의 의식을 사로잡기 여려운 경우는 예외지만 말이다. 

고립된 개인은 망상이나 비현실적 공포에 빠져들기 쉽다. 밥먹듯 자주 이루어지는 만남도 '현실 유지'라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이 무질서로 와해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능이 필요하다. 물론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울 수야 있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한편, 생각을 모으려면 집중력이 필요한데, 주변의 불필요한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에게 주목해야할 피치못할 사정 때문에 좀체 집중할 수가 없다. 항상 친구들과 붙어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학생은-대체로 가정에서소원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복잡한 학습에 요구되는 정신적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하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혼자 있느느 걸 싫어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말할 수가 없다.


[이방인과 개인]

다양한 부족 집단이 처음 조우하여 어울린 곳은 8000년 전 중국, 인도, 이집트 같은 세계적 거대 도시들이다. 상이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처음으로 거기에서 화합을 배우고 생소한 풍습을 용인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점이 있다. 우리가 차이에 대해선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낯선 것과 이국적인 것에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다. 타자들이 기본적으로 우리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행동하리라고 가정할 수만 있따면, 타인이라는 존재는 삶의 질을 높이는 조미료 구실을 톡톡히 한다.

안전하면서도 생기가 감도는 사회환경을 향하여-


[개인 잠재력의 내향과 외향]

서양 철학의 전통은 인간의 잠재력을 두 가지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행동력이다. 이를테면, 공공의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정치 참여, 분명한 입장 표명 등이 그런 예이다. 다른 하나는 명상이다. 가장 충만한 삶은 고독한 성찰, 기도, 거룩한 존재와의 합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흔히 이 둘이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우리는 아직도 이분법의 감옥에 갇혀 있다. 인간의 성격이 역사적으로 내부지향형에서 외부지향형으로 변해 왔다고도 한다. 오늘날 심리학 연구에서도 외향형과 내형형은 사람들의 유형을 분명히 구분짓는 가장 안정된 성격 특성으로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이 더 행복하고 명랑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자료 해석에 주의해야 한다. 내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분명히 토로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성이 뛰어난 개인은 외향과 내향의 특성을 모두 보여준다. 

'고독한 천재'라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낙오되기 십상이다. 남의 도움 없이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라고 한다. 과학은 군집성이 강한 영역이다. 하지만 집필은 전혀 다르다. 집필은 고독한 작업이다. 내면 지향적 성찰과 강도 높은 사회적 활동은 모두 필요하다.

내향과 외향 스펙트럼의 양 극단의 한 자락에만 갇혀 삶을 집단성 아니면 개인성 어느 하나로만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비정상적 태도가 아닐 수없다. 물론 타고난 기질이나 자라온 환경의 탓으로 두 극단성 가운데 어느 하나에 치우치기 쉬우며 세월이 흐르면 어느새 그것이 몸에 익어 활발한 어울림 아니면 쓸쓸한 고독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람의 다양한 경험 영역을 축소하고 삶을 향유하는 숨낳은 가능성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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