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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uistics

센과 치히로의 기호

by 앎의나무 2007. 4. 25.

김현주 2002, "영화속의 기호", <나랏말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편집위원회.

『영화 속의 기호』

- 이름을 찾아 달라는 몸부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리보기

0. 언어학의 성립과 언어학의 인접학문으로서 기호학

1. 만화영화의 특징과 기호

-르네마그리뜨와 관련하여

-만화영화를 기호로 보려는 준비

2.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과 세계관

-금곰상의 의미

-그의 작품세계

3.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설정과 기호들

-세계

-인물과 이름의 법칙

-사건

-기타

4. "produced by Miyazaki Hayao"

0. 언어학의 성립과 언어학의 인접학문으로서 기호학

18세기 Rasmus K. Rask, Franz Bopp, Jakob Grimm 등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역사비교언어학이 하나의 인문과학으로 인정되었다. 이것이 현대적 언어학(Linguistics)의 시작이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친 Ferdinand de Saussure(1916), Louis Hjelmslev(1943), Vilem Mathesius(1947), Leonard Bloomfield(1933), Edward Sapir(1921) 등을 통해 언어학은 비로소 공시적 연구와 통시적 연구의 틀을 세우고 구조주의적 연구방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였으며 연구의 대상도 개별적 발화(parole)가 아닌 보다 본질적이고 사회적인 언어 즉 랑그(langue)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후 Noam Chomsky(1957)에 의해 변형문법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언어학을 구조주의 언어학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살고 있는 경험세계를 무자르듯 가를 수 없지만 인간은 이를 임의로 범주화한다. 그렇게 범주화된 세계의 조각들은 기호로 -흔히 어휘로- 표현된다. 여러분은 ‘접시’와 ‘사발’을 구분하여 따로 부를 만한 객관적 기준을 갖고 있는가? 기호란 경험세계를 범주화하는 도구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기호들을 문장이라는 나름의 체계 속에 투영해 자신의 의사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 과정의 각 부분들을 음운론, 문법론, 의미론 등 언어학의 하위 갈래가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심리학, 논리학, 철학, 기호학, 인지과학 등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언어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인접학문들이다.

언어도 하나의 기호이고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문자도 하나의 기호이다. 따라서 기호학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언어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언어학이니 기호학이니 하는 단어들도 학문이라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임의적인 범주화여서 둘 사이에는 겹치는 영역이 넓고 관련도 많다.

1 만화영화의 특징과 기호

1.1 르네 마그리뜨와 관련하여

마그리뜨는 3차원의 세계를 원천적으로 2차원인 회화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그의 작품들을 통해 암시해 왔다. 누구나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에 그는 파이프를 그려 넣고선 ‘이것은 (하나의)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함께 그려넣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 중에서도 ‘실제의 파이프가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라고 이해할 근거가 그의 다른 작품을 통해 나타나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특히 그림 속에 그림이 등장하는 작품들의 경우(아래 오른쪽), 현실이 그림으로 들어오면, 그림 속의 그림과 그림 속의 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돼 더 이상 현실의 의미를 갖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에는 마그리뜨가 회화를 향해 쏜 회심의 살이 빗겨 간다. 애니메이션의 한 갈래인 만화영화는 실사영화와 전체적인 방식에서는 유사하지만, 빛의 피사체인 필림에 담기는 것이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비록 렌즈를 통해 완벽하게 원근법을 실현하고 현실을 잡아 내는 사진기술이라고 해도 원천적으로 2차원 매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사진도 마그리뜨의 과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고, 사진을 같은 공간에 다른 시간으로 배열하는 기법을 이용한 영화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

만화영화도 2차원의 예술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만화영화는 ‘현실세계’를 렌즈를 통해 담아내지는 않는다. 굳이 대상을 찾는다면, 감독의 머리 속에 떠다니는 이야기의 이미지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화영화의 한컷한컷은 렌즈를 통해 맺힌 상이 아니라 하나하나 손으로 그린 그림을 담은 것이다. 즉 만화영화로 표현하려는 직접적은 목표물은 감독이나 기획자의 머릿속 이미지라는 것이다. 머릿속 이미지에 대해 누구도 그것이 2차원인지 3차원인지 혹은 그 이상의 차원인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마그리뜨의 발상은 만화나 만화영화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만화영화에 실린 것은 애초 현실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미지)이기 때문이다.

1.2 만화영화를 기호로 보려는 준비

애초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써 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도구적 기호관의 입장에서 볼 때, 만화영화는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여러 징후와 아이콘, 상징들로 엮어져 추리와 해석을 요구하는 하나의 커다란 기호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표’가 대신 ‘징후’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바가 암시하듯, 표상적 기호관이 아닌 도구적 기호관의 입장인 ‘루디 켈러’의 저작 “기호와 해석”을 기본틀로 삼아, 일본이 낸 불세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만화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하나의 커다란 기호로 이해해보려고 한다. 먼저 ‘루디 켈러’가 설정한 중요 개념부터 살펴보자.

‘징후’는 의도가 없이 기호가 된다. 즉, 발신자가 없다. ‘징후’는 사물의 특징 때문이 아니라 해석적 이용 때문에 징후가 된다. 부분을 보고 전체를 해석해 내는 것이나, 결과를 보고 원인을 되짚어 내는 것, 수단을 보고 목적을 추리해 내는 것이 ‘징후’의 기술이다. 제비가 땅을 스치듯 날아 다니는 것은 비고 온다는 ‘징후’이다.

‘아이콘’은 의사소통을 위한 순수한 기호로 발신자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소리, 그림, 몸짓이 모두 ‘아이콘’이 될 수 있다. ‘아이콘’은 정도에 따라 직접적이냐 간접적이냐로 나눌 수 있고, 강약의 정도도 나눌 수 있다. ‘아이콘’은 연상을 자극하는 단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미항공우주국의 Pioneer Project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위성 Pioneer 10호에 실렸던, Cornell 대학의 천문학자 Carl Sagan 교수가 고안한 다음 그림이 ‘아이콘’의 본보기이다.

‘상징’은 규칙성을 전제로 한다. 연상추론의 빈번함은 규칙에 입각한 추론으로 이행되어 상징이 된다. 가령 한자의 ‘人’은 애초 ‘아이콘’으로써 인체와의 유사성이란 연상추론을 통해 그 의미를 갖게 되나, 이후에는 자동적인 규칙으로 ‘사람을 가르키는’ 기능을 갖게 된다. 이런 자동적 규칙을 ‘자동화’라고 부른다.

2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과 세계관

2.1 금공상의 의미

알고보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한국 사람들은 물론 전지구의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사람이다. 제목만 들면 모두 ‘아~!’하고 탄성을 자아낼 작품들이 그가 감독한 작품들이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미래소년 코난’을 뽑을 수 있고, 그 밖에 ‘빨간머리 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명탐정 번개’ 등의 텔레비전 시리즈에서부터, 극장판으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의 토토로’, ‘천공의 성 라퓨타’, ‘평성 너구리 대작전 포폼코’, ‘월령공주’와 최근 개봉작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까지, 하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만화영화로는 최초로 금공상을 받았는데,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단순히 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만이 아니라 현대사회를 상대로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메시지들’를 꾸준히 일깨워 온 사람으로 공식적 인정을 받은 결과로 볼 수 있다.

2.2 그의 작품세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자연주의자 혹은 생태주의자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나바’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는 항상 자연과 문명(과학)이 대립하고 있고, 감독은 둘의 대립이 아닌 둘의 통합이 이루어진 공동체를 꿈꾼다는 것이 ‘이바나’ 교수의 생각이다. ‘미래소년 코난’,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평성 너구리 대작전 포폼코’, ‘월령공주’ 모두의 공통점은 자연과 문명의 대립과 그 극복의지이다. 어쨌든 결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진의가 문명의 배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구조의 예외가 있다면 ‘이웃의 토토로’ 정도라고 할 수 있으나, 이도 실은 문명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이웃의 토토로’를 통해 한창 도시화가 진행 중인 일본의 상황에 대한 걱정을 보여주려고 했고, 따라서 현실과는 반대로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온 가정을 소재로 삼아 밝은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일견 그의 여러 작품에서 자연파괴에 대한 경고들이 많이 보이기에 그를 생태주의자로 오해하기 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미래소년 코난’에서 ‘코난’과 ‘니나’는 문명이 인간에게 줄 영향에 대한 ‘징후’인 ‘인더스트리아’를 떠난 후 자연의 넉넉함에 대한 ‘징후’인 ‘하이하바’로 가지 않고 천재 과학자였던 ‘니나’의 할아버지가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은 이상적 공동체의 ‘징후’로써 자연과 문명이 만나는 곳으로 해석된다. 또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의 지상과 하늘이 각각 자연과 과학이 인간에게 안겨줄 미래에 대한 ‘징후’로 해석되고, 과학의 결정체인 ‘거인로봇’이 끝까지 살아나게 되는 것은 이상적 공동체의 ‘징후’로 해석된다. 그의 작품들에 설정되는 여러 장소를 ‘아이콘’ 대신 ‘징후’로 본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이 문명과 자연을 의미함을 알리려는 뚜렷한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의 작품작품에서는 항상 ‘문명’과 ‘자연’의 대립과 ‘이상적 공동체로의 통합’이 징후로 기호화되어 있다. 이제 새로 나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해 기존의 잣대를 ?옛咀맛?

3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설정과 기호들

3.1 세계

이 만화영화는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직설적으로 자연파괴를 다루지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장소는 인간들의 세계가 아닌 ‘신들의 영역’이다. 특히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진행되는 장소는 ‘유바바의 목욕탕’이다. 그러나 역시, 아래에서 보겠지만, 자연파괴와 문명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신들의 목욕탕’인 ‘유바바의 목욕탕’에서 일어나는 가지가지 일들은 인간의 자연파괴가 신의 영역에까지 해를 끼치고 있다는 ‘징후’들을 담기 위한 설정이다. 이 경우 ‘신’들의 목욕탕 자체가 ‘신의 영역’을 보여주는 ‘아이콘’으로부터 차차 ‘상징’이 된다. 왜냐하면 처음 작품이 시작되는 동안은 세심한 관찰과 유추를 통해서만 감독이 ‘이 세계는 신의 영역’임을 전하고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작품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그곳이 ‘신의 세계’를 나타내는 ‘설정’임을 까다로운 유추 없이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천천히 살펴보면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로 변하는 시장통의 상점들의 이름이 뭔가 이상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의 가나문자와 한자로 적혀 있긴 하지만, ‘천개의 눈알’, ‘사람의 고기’ 등의 상점이름은 이야기가 펼쳐질 공간이 평범한 세계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작품에 설정된 장소에 대한 아이콘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신들의 세계의 구조를 보면 인간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지위가 높은 신도 있고 천한 신도 있고, ‘유바바’가 고용한 ‘신’들도 웨이타에서 청소부, 보일러실 관리자, 왕따까지 각양각색인 것이 인간의 세계와 닮아 있다. 인간 세계와 똑 같은 구조를 갖는 신의 세계는 인간 세계에 대한 모사로 볼 수 있으며, 그것도 신랄하게 풍자하는 모사이다. 이 작품의 세계는 감독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단순한 ‘징후’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의미하는 ‘아이콘’이다. 이 ‘아이콘’이 전달하는 바는 인간세상이 뭔가 삐딱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상적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 결론을 미리 내리면 이번 작품에서도 감독은 ‘공동체’의 자리를 암시로 끝내고 만다. 우선 작품에서 무엇이 대립하고 있고 감독은 무엇의 통합을 꿈꾸는지부터 알아보자.

3.2 인물과 이름의 법칙

‘유바바’, 그의 쌍둥이 언니 ‘제니바’, 이름을 잃어버린 하쿠와 ‘센’을 중심으로 이름의 의미와 그것이 끝내 어떻게 하나의 상징이 되는지 살펴보겠다.

‘롤랑 바르뜨’는 ‘이름’이 ‘정박’의 기능을 갖는다고 했다. 물론 ‘바르뜨’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지만, 지시적 의미의 기호로써, ‘이름’을 갖는 존재의 의미값을 찾아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는 ‘나로 하여금 내가 되게 하는 것’을 정체성이라고 했다. 또 사춘기를 겪어낸다는 것을 ‘어른’이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이 된다. 따라서 ‘이름’을 찾는다는 건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보자.

‘유바바’의 수하가 되면 모두 자신의 이름을 잃게 된다. 자신의 이름자 중 한 글자만 빼고 나머지를 ‘유바바’가 접수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모두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계의 ‘이름에 대한 법칙’이다.

‘치히로’가 준 힌트로 본래의 이름을 깨달은 ‘하쿠’가 돌변하여 ‘유바바’의 오른팔이라는 자신의 직분을 버리고 ‘유바바’와 담판을 짖게 되는 이유는 신 가운데에서도 지혜로운 신에 속하는 ‘용’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다. 또 ‘제니바’가 ‘치히로’에게, “이름을 소중히 간직해라”라고 말한 것도 ‘이름’이 갖는 코드가 ‘정체성’임을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제니바’는 외관상 ‘유바바’와 구분되지 않는, 극단적으로 말해 이름으로만 구분되는 쌍둥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바바’가 ‘치히로’로부터 이름을 뻬앗아 가는 이야기의 초반에 ‘이름’이라는 기호에 대해 무언가 감지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과 함께 ‘이름’을 빼앗기는 것이 ‘자신’을 잃는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유추하면서 ‘이름’을 정체성과 관련하여 징후화한다. 그리고 제니바의 ‘이름을 소중히 간직해라’라는 직접적 당부에서 아이콘으로 인식된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하쿠’가 자신의 정체성, 즉 ‘이름’을 찾는 장면에서는 이미 ‘이름’이란 ‘정체성’을 의미하는 기호임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이곳에 이르르면 ‘이름’은 ‘정체성’을 의미하는 기능을 갖는 상징이 된다.

이 만화영화에서 이름의 코드는 정체성이고 이름이라는 기호의 자격은 징후에서 아이콘으로 아이콘에서 상징으로 점차 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3.3 사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번 작품은 ‘문명’과 ‘자연’만이 대립하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거기에 ‘욕망’과 ‘사랑’까지 더해졌다. 이야기의 여러사건들은 이런 구조에 대한 기호로 해석된다.

처음 ‘치히로’의 부모는 무모한 욕심을 부려 ‘돼지’가 된다. ‘신의 영역’에까지 넓힌 욕심때문이다. 다음으로 ‘가오나시’라는 ‘왕따’ 요괴가 다른 신들을 잡아 먹을 때를 보자. ‘가오나시’는 ‘금’을 사용한다. 모두들 자신이 먹힐 줄은 꿈에도 모르고 ‘금’에만 마음을 빼앗긴다. ‘제니바’의 쌍둥이 여동생 ‘유바바’는 언제나 목욕탕의 매출을 올리는 데에 혈안이 돼 있다. ‘하쿠’는 ‘유바바’에게 마법을 전수받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유바바’에게 맞긴다. 모두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중요한 것을 잃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가 된 사건을 보면, 그 뒤에는 지나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인과적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이때 돼지는 ‘욕심’의 ‘징후’이다.

그런 ‘욕심’은 어떻게 극복이 되는가? 그것은 아무 대가 없는 관심과 배려, 한마디로 사랑이다. 왕따인 ‘가오나시’에게 아무 조건 없이 따듯하게 대하고, 부모를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며, ‘하쿠’를 구하기 위해 성심을 다하는 ‘치히로’의 모습은 모두 ‘사랑’의 징후로 해석된다.

‘하쿠’의 사연을 생각해 보면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연’과 ‘문명’의 문제를 항상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쿠’는 ‘고하쿠’라는 개천의 ‘신’이었으나, 그곳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어 살 곳을 잃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유바바’조차 ‘강의 신’을 ‘오물의 신’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무겁다. ‘강’은 ‘자연’에 대한 ‘관습적 상징’이므로, ‘강’이 ‘오물’로 오해될 정도로 오염되었다는 의미의 ‘오물 신’ 에피소드는 자연파괴와 오염에 대한 경고의 징후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오물신이 나중에 ‘강의 신’으로 밝혀지는 인과과정을 통해서 자연파괴에 대한 경고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따라서 ‘오물 신’ 에피소드는 ‘자연파괴에 대한 경고’의 징후가 되는 것은, 이 작품에서 ‘신’이 바로 ‘자연’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이 즉 ‘신’들이 욕심 많은 인간은 가만두지 않는다. ‘치히로’의 부모들과 함께 있던 수많은 돼지들은 인간의 욕심의 징후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분노’에 대한 징후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연히 ‘인간’은 ‘문명’의 징후이다.

감독의 ‘이상적 공동체’는 이번 작품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는 ‘치히로’와 ‘하쿠’의 사랑을 통해 ‘이상적 공동체’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 암시를 주고 있다. 인간인 ‘치히로’와 신인 ‘하쿠’의 사랑은 ‘신’이 ‘징후’가 되는 자연과 ‘인간’이 ‘징후’가 되는 문명이 어울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전작품보다 한 단계 발전해서, 어울림의 주체는 ‘인간’이라는 것을 작품에서 유일한 능동적 인물인 ‘치히로’라는 ‘징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3.4 기타

먼저 유바바의 기호와 외모에 대해 살펴보면. 그녀의 ‘시가담배’는, 다른 서양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만화영화 속에서도 높은 지위나 부를 상징한다. 그녀의 ‘큰 머리’는 마녀로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 ‘징후’이다.

신들의 ‘기차’는 인간과 자연이 어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증기동력의 탈 것은 미야자키 감독에서는 문명의 대표적 이기인데, 거기에 자연의 징후인 ‘신’들이 자연스럽게 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치히로’에게 ‘제니바’와 쥐로 변한 ‘보우’, 홀쭉이 ‘까마귀’가 직접 만들어준 ‘머리끈’은 일종의 부적이다. ‘유바바’에 필적할 마법실력을 갖춘 ‘제니바’는 마법으로 머리끈을 만들지 않는다. 벗의 염원이 담긴 부적으로서의 ‘머리끈’은 손으로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말을 한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강의 신’이 깨끗한 자신을 되찾은 후 ‘치히로’에게 주는 환약은 더럽고 추한 마음을 고쳐준다. 이 쓰디 쓴 환약은 깨끗한 자연이 인간에게 배푸는 것으로 해석된다. 문명의 혜택을 조금 줄이는 건 문명에 찌든 인간에게 쓴 환약을 삼키는 것처럼 힘든 일이겠지만, 그 결과 자연이 인간에게 돌려 주는 건 헤아릴 수 없는 큰 혜택이란 이야기는 아닐까?

‘머리끈’은, 자세히 본 사람은 알겠지만, ‘치히로’를 위험에서 구해준다. 아니 사건의 결과 그렇게 여기게 된다. ‘치히로’가 신들의 세계에서 탈출하게 될 때 ‘하쿠’는 ‘치히로’에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인간세계’로 통하는 터널입구에서 ‘치히로’의 고개가 뒤로 돌아 가려고 한다. 순간, ‘머리끈’이 반짝이고 ‘치히로’는 담담히 터널로 들어간다. 이때까지 ‘머리끈’은 ‘치히로’를 지켜주는 친구들의 염원이 담긴 부적의 ‘징후’이다. 그리고 터널을 빠져나와 회상하듯 물끄러미 터널을 바라보는 ‘치히로’의 머리끈이 한 번 더 반짝인다. 이제 ‘머리끈’은 ‘징후’가 아니다. ‘치히로’에게 ‘머리끈’은 신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과 그로 인해 정체성을 찾게 되었던 경험을 마치 헝클어진 머리칼을 머리끈이 하나로 묶어내듯이, 과거의 일들을 단단히 추억에 묶어주는 ‘아이콘’이 된 것이다. 앞으로 ‘머리끈’이 치히로에게 ‘상징’이 될 것임을 불을 보듯 뻔히 알 수 있다.

4 "produced by Miyazaki Hayao", ‘자연과 문명의 이상적 공동체‘의 상징

후속작으로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한 이야기를 짜고 점점 더 단순하게 풀어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능력은 경륜에서 나오는 것인가? 항상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무언가 알리고, 행동을 유발시키려는 감독의 노력은 그의 작품을 시간순서대로 보아온 사람이라면 다들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워낙에 재미있게 작품을 만들어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계속 보아왔다.

이글 처음에 작품 자체가 기호가 된다고 언급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항상 자신의 메시지를 작품에 담았고 그 의미대로 사람들이 행동하길 원했다는 점에서 작품자체가 그의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아이콘이라고 볼 수 있다. 매 작품은 아이콘이 되고 코드는 ‘자연’과 ‘문명’의 ‘이상적 공동체’추구 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콘의 유추과정이 자동화로 전환되면 아이콘은 상징이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계속 보아온 내게 그의 작품이 이제는 ‘상징’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내용을 보고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작품은 모두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조화롭게 극복해내는 ‘이상적 공동체’의 추구를 촉구하는 ‘상징’의 기호로 해석된다.

<참고서적>

롤랑 바르뜨 선집 14, <텍스트의 즐거움>

루디 켈러, <기호와 해석>, 이기숙 옮김, 인간사랑, 2000

황의웅,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 예솔, 1998

이나바 신이치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나우시카를 읽는다>, 정윤아 역, 미컴, 1999

동아 대백과 사전(네이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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