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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zing

내가 가장 이뻤을 때

by 앎의나무 2007. 1. 17.

내가 가장 이뻤을 때
길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쪽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몸맵시를 생각해 볼 틈마저 잃고 말았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그 누구 하나 다정한 선물도 보내주지 않았다
사내들은 거수경계밖에 모르고
서글서글한 눈매만 남겨놓고 죄다 떠나갔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내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딱딱했고
손발만이 밤빛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 졌다
어디 그럴 수가 있는가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올리고 비굴한 동네를 걸었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들렸다
금지된 담배연기를 들이마셨을 때처럼 어찔어찔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식했다

내가 가장 이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전혀 종잡을 수 없었고
나는 너무나 쓸쓸했다

그러기에 마음먹었다 될 수 있는 한 오래 살자고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말이지

이바라기 노리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