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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zing/Maturana and Varela

윤리적 노하우

by 앎의나무 2010. 2. 21.

윤리의 숙련자

 

나아가 우리는 다른 모든 양상의 행위들을 획득하는 방법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윤리적 행위를 획득한다.

그 행위들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성장하면서 우리에게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학습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순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학습자로 인정받는다.

[cf.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윤리적 숙련자는 공동체의 전면적 참여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매우 섬세하게 짜여진 전통에 소속되어 마음 편하게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숙련자인 것이다.

 

 

동양의 전통적 가르침

 

윤리적 대응을 중요한 관심거리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동양의 몇몇 위대한 전통적 가르침들은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본다.

윤리와 도덕적 인경의 성취에 관한 맹자의 견해는 인간의 본성은 양성flourishing할 수 있다는 점과 사람들이 본성을 양성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성취를 볼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맹자의 견해는 사람의 본성과 적절한 발달조건이 결부되어 개인의 정서적 반응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능력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방해받지 않고 잘 양성되 때 바람직한 자질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타락과 원죄"라는 서구 기독교 전통과 정반대의 입장이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선언할 때, 맹자는 잠재된 존재론적 토대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진실로 내재한 것에 주목하기만 하면, 인간은 누구든지 선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선하다고 하는 것의 의미이다. 인간이 악하게 된다면 그것은 타고난 품성 탓은 아니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능동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계발하여"가는가?

 

推 - 미루어 적용한다 = 어떤 상황에 맞이했을 때, 평범한 노하우를 새로운 상황에 확장하는 것 ; 모든 기술art들에 적용하는 학습원리와 같다 = 사람은 누구나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기술을 익히기 시작해서, 적용되는 영역을 넓혀가는 방식으로 그 기술을 더 복잡한 상황으로 확장해 간다.

知 - 지적 주의 - 推는 사람들이 지적 주의력을 발휘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주의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 정감들을 확장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황이 또 다른 상황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정감들을 그 새로운 상황 속으로 전개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思 - 각성 상태 - 知에 의해 推가 인도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각성 상태이다. = 구체적인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자연스러운 능력

 

요컨대, 맹자가 말하는 윤리적 훈련은 "상황을 분명히 지각하고, 상황들 사아의 일치나 유사성을 깨닫는 과정"이다.

맹자에게, 법칙이나 규칙은 오직 "주의깊게 성찰한 뒤에야, 또는 시비를 가려야만 하는 곤란한 상황들 속에서나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상황을 특정 규칙에 입각해 판단하려 한다면, 그 상황을 일종의 인지적 범주들로 기술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들 사이의 유사성을 보려 한다면 해당 상황은 훨씬 더 구체적으로 지각될 것이며 범주적 분석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측면들까지 포괄하여 모든 중요한 측면들이 고려될 것이다.

 

맹자에게 있어서, 오직 진실로 덕이 있는 사람들만이 그들 자신의 본성에 유의함으로써 체험에 의하여 하나의 사건을 대단히 잘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하여 그것을 적절히 확장해 가는 일을 순탄하게 이어간다.

이들에게 있어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도덕적 행위로 이어지는 도덕적 판단이란 상황에 대한 참된 기술과 구분되지 않는다.

[but, 규칙에 입각해 상황을 판단한다면, 그 상황을 일종의 인지적 범주들로 기술해야한 한다.]

만약 어떤 행위가 본성으로부터 유발되지 않은 것이라면 그 행위는 옳을 수는 있어도 온전하게 덕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맹자는 이 차이를 군자 vs 향원의 구도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향원은 "세속에서 옳다고 간주되는 탁월한 모조품"이다.

 

맹자의 행동 유형 분류 

1) 이득을 얻으려는 욕구에서 나오는 행동

2) 습관화된 반응의 유형으로부터 나오는 행위 - 지적주의력(知)에 의해 인도되지 않은 것이며, 고로 이들은 상황을 정확하게 지각하는 데 실패한다.

3) 규칙을 추종하는 데서 일어나는 행위 - 자동차 운전기술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들과 같다.

4) 推의 결과 - 윤리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전문가가 노하우를 체화해 있듯이, 인과 의를 체화해 있는 것이다. 현자는 윤리적이다. 

 

따라서 현자의 행위는 그의 품성이 구체적인 상황에 반응하여 일으키는 성향이 인도하는 쪽으로 이루어진다.

진실로 숙달된 사람은 확장된 경향들을 따라서 행위하게 되는 것이지, 교훈을 따라서 행위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순전히 습관적인 대응의 방식들 속에 담긴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지적주의력(知)이란 무의식적 표출과 이성적 계산 사이에서 중용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지성의 인도를 받아야 하지만, 이것은 어떤 추상적인 규칙이나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즉흥되는 상황과 어울리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윤리적 행위는 무의식적 자연발생성과 이성적 계산 사이에 있는 중도를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윤리적인 사람은 다른 종류의 전문가들이 그렇듯이, 자연발생적으로 행동한 뒤에 그 행위를 정당화 해주는 지적주의력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전문가가 그렇듯이, 진실로 윤리적인 사람은 지속된 학습을 위한 디딤돌로서 그러한 사후 정당화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중한 분석 방법을 통해서 숙련자가 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지적주의력(知), 각성(思, 깨어있음), 확장(推)의 상호작용이 비록 평범한 사람이더라도 진정으로 덕을 지닌 사람이 되는 방법이라는 사실과 진실로 윤리적인 행위는 향원의 행위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게 된다.

 

 

윤리의 숙련을 위한  실용적 열쇠

 

유불선의 실용적이고 점진적인 접근

무위 - 즉각성이 숙고보다 앞서는 성향, 비이원적 행동이 주체와 객체의 근본적 구별보다 앞서는 성향을 성취하는 과정

한 사람이 자신의 자아를 잊는 것 - 자신의 공(空)을 자각하는 것이고, 한 사람의 성격이란 조건에 의한 것이며 동시에 잠정적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모든 숙련자들이 이러한 공의 감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예술과와 운동선수들은 자아의식이 최상의 활약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해 왔다. (cf. 사랑의 기술, 몰입의 즐거움)

 

자의식적인 행동 또는 의도적 행동과 무아의 행동 또는 비의도적 행동을 구별할 수 있다.

옷을 입고, 음식을 먹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등의 행동들.

우리는 이런 행동을 의도 없이 행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닥치는 대로 하는 것도 아니며, 순전히 자발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에 관해서 숙련자들이기 때문에 의도 없이 그것들을 행하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을 적절히 확장하고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그리고 훈련이 되어감으로써 이러한 행동들을 체화된 행위로 변형시켜 온 것이다.

 

그러한 비의도적인 학습을 가능하게 해주는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우리의 미시세계들과 미시개채들은 그 어느 것도, "견고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단일한 하나의 자아 속에 함께 들어와 고착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패턴들의 연속적 과정에서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것이다.

자아는 파악 가능한 어떤 실체적 '속성'도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과같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자아의 空에 담긴 거대한 개방성을 왜곡시키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다면 더 원대한 자아의 이해에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들은 커지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그것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자아 이해를 정신의 기능에 대한 외적이고 과학적인 설명과 통합하는 귀중한 단서가 된다.

 

 

비단일체적인 인지적 자아들에 관하여

 

인지과학 분야의 보수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는 계산주의자의 관점에서조차 하나의 고정적이고 집중화된 단위로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된다.

계산주의에서 인지를 행하는 주체 혹은 자아는 근본적으로 조각조각 흩어져 있고 결합되지 않은 것이라느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입장은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정신적 또는 인지적 과정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자아의식적은 성찰을 거치거나 프로이트 학파의 심리치료 같은 절제된 형태의 내성적 분석을 통한다면,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할 수 있다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계산주의는 전혀 의식으로 알 수 없는 정신적 과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물론 프로이트도 마음과 의식이 동일하다는 관념에 도전했고, 마음과 의식을 구별하는 것은 자아/인지주체를 분열시키게 된다는 점으르 확실히 알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신념, 욕망, 자극에 관한 논의에서, 이러한 무의식적 과정들은 영혼의 심연 속에 숨겨진 우리 자신들의 조각에 속하는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인지주의는 인지와 의식(특히 자아의식)이 동일한 영역에 속한다는 통념에 직접 반대한다.

인지주의에서 인지와 표상은 분리가 불가능하지만, 인지와 의식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와 같은 자아의식을 가진 개체에게 있어 의식은 정신적 과정의 한 종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만약 자아의식이나 의식이 인지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인지를 하고 있는 주체는 과연 무엇인가? 인지의 주체라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합한 전체적인 정신적 과정의 집합인가, 아니면 의식과 마찬가지로 단지 또 다른 종류의 정신적 과정인가?

 

"하위개인적" 활동들 가운데서 하나의 정합적이고 통일된 자아를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진실로 하나의 자아가 있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자아는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뒤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계산주의에서는 인지는 의식 없이 진행된다고 본다. 둘 사이에 필연적이거나 필수적인 관련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아를 뭐라고 생각하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의식을 자아의 중심 특징으로 간주하고, 의식이라는 자아의 중심적 특징은 인지를 필요로 한다고 본다.

인지주의자들은 자아는 인지에 필요하지 않다는 함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과학이 긍정하는 것과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이 주장하려는 것 사이에 있는 긴장은 명백해 보인다.

인지가 자아 없이 진행될 수있다면, 왜 우리는 자아의 경험을 갖는가?

지금까지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난처한 점들이 인지과학의 직접적 목적과 관련이 없다며 무관심한 태도로 경시해왔다.

이 분열은 가상적 자아를 발생시키는 뇌의 기제로부터 나타나는 창발적 속성들에 의해 본질적으로 배태되는 것이다. (다음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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