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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uistics

중국에서의 문자의 기능변화

by 앎의나무 2008. 4. 24.

문자는 애초에는 매우 신성한 것이었다.

갑골문자는 은나라의 것인데, 갑골문은 기본적으로 종교의식과 관련된 것이다.

물론 당시에 갑골문만이 아니라 돌이나 청동에 새겨 놓은 문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모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나타내기 위한 것들이었다.

왕(혹은 황제)만이 그것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것이 최초로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이 춘추전국시대이다.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제후들은 자신을 왕과 동등한 위치에 세우려고 했다.

백년을 넘게 이어진 춘추전국시대 동안 다양한 서체들이 생겨났다.

게다가 제자백가란 사람들은 왕이나 제후도 아닌데 문자를 다루었고 심지어 그것을 제자들에게 보급하기까지 했다


진의 시황제가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내리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다양한 제도를 일원화했다.

그 와중에 문자도 진의 문자를 중심으로 일원화했다.

그리고 다시 문자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

분서갱유는 황제의 문자를 다시 황제의 문자로 세우기 위한 조치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때까지 쓰인 한자는 전서체였다.

본래 점토로 청동을 주조하는 과정에서 새겨 넣은 것으로 그 문자의 모양은 변의 두깨가 같고 둥글둥글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행정적인 차원에서 죽간을 쓰게 되면서 필기도구의 변화는 문자 모양의 변화도 몰고 왔다.

행정을 위해, 왕이 쓰는 것이 아닌, 관리가 쓰는 문자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을 노예의 隸자를 써서 신하들의 문자, 즉 예서라고 한다.


예서는 기본적으로 죽간에 썼으며, 최초의 붓은 미술용 붓 중에 납작한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로세로의 두께가 일정하고 딱딱한 서체인 예서가 생겨났다.

(죽간의 높이는 이후 죽간이 없어진 후에도 책의 규격, 특히 높이를 제한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종이가 발명되고 종이에 적합한 붓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둥근 모양이었다.

그러나 역시 사슴의 털을 썼던 것으로 뻣뻣하기 그지 없었다.

종이의 질이 좋아지면서 붓도 부드러워졌는데 그러면서 한자의 자체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리하여 드디어 수나라에 이르러 해서가 생겨나게 된다.



문자의 문화사 (후지에다 아키라)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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