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고전 중 '노자'만큼 널리 읽히고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진 책도 드물다. '노자'를 지은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오늘날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산재되어 있는 사료를 종합한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노자는 대략 기원전 570년에서 470년 사이에 살았던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 또는 노(老)씨,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중국 남방에 있던 초(楚)나라 상현(相縣)(또는 苦縣)에서 태어나 살다가 대략 30세 이후로는 패(沛)로 옮겼으며, 그 뒤에는 주나라에서 장서실 일을 보는 등의 벼슬을 하면서 20~30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주나라의 권력 투쟁 등으로 환멸을 느껴 다시 패로 갔다가 70세 경 은둔하기 전 '노자' 5천여 자를 남겼다. 진(秦)에 은거 후 100세 가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노자'는 두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편은 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도편'이고 다른 한 편은 덕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덕편'이다. 이것을 후대에는 경의 권위를 부여하여 흔히 '도덕경'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전해져 오는 '노자'에는 여러 판본이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판본은 하상공과 왕필이 주석을 붙인 '노자'이다.
'노자'는 2000여 년 전 이국의 한 늙은이가 쓴 케케묵은 낡은 책이다. 강산도 수백 번이나 바뀌었을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 그 낡아빠진 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회와 문명의 모습이 그때와는 천양지차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현대에 와서 '노자'는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노자'를 읽고 그로부터 많은 지혜를 얻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노자가 살았던 시기는 대략 중국의 춘추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그 시기는 약해진 주 왕조 아래서 여러 제후국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느라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지던 혼란의 시기였다. 그 시대 위정자들은 패권 다툼을 위해 백성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내몰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으며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억압하였다. 이런 가운데 재주 있는 자들은 제각기 자신의 재주를 뽐내며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한답시고 권력자의 편에 빌붙어 사리사욕만을 꾀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위해 서로 다투게 되니 인간의 삶이 각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자는 이러한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며 고민했던 철인이었다. 그는 혼돈과 폭력과 다툼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고심해 찾았던 사상가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류의 상황은 어떠한가? 과연 오늘날 우리 인류 사회는 억압과 착취, 다툼과 혼란, 그리고 고통이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되었는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면 결코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어쩌면 인류 사회는 노자가 해결하기를 그토록 갈망했던 문제와 고통들을 오히려 격화시켜 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제시한 '노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전으로서의 생명력을 갖는다. 우리는 '노자'에서 수많은 고통과 불행을 재생산하고 있는 현대문명과 삶의 양식을 극복할 수 있는 사유의 단초들을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도달하기를 꿈꾸는 미래의 모습은 이미 오랜 과거의 삶 속에 들어있었으므로 그것을 발굴해 되살려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노자'역시 우리의 '오래된 미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해설서들이 존재하고 있는 마당에 또 다시 단순하게 '노자'의 자구 해석을 반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의 노자 읽기는 오래된 노자의 가르침을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삶,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 인류가 나아갈 미래문명과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되살려내는, '오래된 미래'로 나아가는 여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 -국제.06.7/5 -
그 후 주나라의 권력 투쟁 등으로 환멸을 느껴 다시 패로 갔다가 70세 경 은둔하기 전 '노자' 5천여 자를 남겼다. 진(秦)에 은거 후 100세 가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노자'는 두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편은 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도편'이고 다른 한 편은 덕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덕편'이다. 이것을 후대에는 경의 권위를 부여하여 흔히 '도덕경'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전해져 오는 '노자'에는 여러 판본이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판본은 하상공과 왕필이 주석을 붙인 '노자'이다.
'노자'는 2000여 년 전 이국의 한 늙은이가 쓴 케케묵은 낡은 책이다. 강산도 수백 번이나 바뀌었을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 그 낡아빠진 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회와 문명의 모습이 그때와는 천양지차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현대에 와서 '노자'는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노자'를 읽고 그로부터 많은 지혜를 얻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노자가 살았던 시기는 대략 중국의 춘추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그 시기는 약해진 주 왕조 아래서 여러 제후국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느라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지던 혼란의 시기였다. 그 시대 위정자들은 패권 다툼을 위해 백성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내몰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으며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억압하였다. 이런 가운데 재주 있는 자들은 제각기 자신의 재주를 뽐내며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한답시고 권력자의 편에 빌붙어 사리사욕만을 꾀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위해 서로 다투게 되니 인간의 삶이 각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자는 이러한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며 고민했던 철인이었다. 그는 혼돈과 폭력과 다툼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고심해 찾았던 사상가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류의 상황은 어떠한가? 과연 오늘날 우리 인류 사회는 억압과 착취, 다툼과 혼란, 그리고 고통이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되었는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면 결코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어쩌면 인류 사회는 노자가 해결하기를 그토록 갈망했던 문제와 고통들을 오히려 격화시켜 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제시한 '노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전으로서의 생명력을 갖는다. 우리는 '노자'에서 수많은 고통과 불행을 재생산하고 있는 현대문명과 삶의 양식을 극복할 수 있는 사유의 단초들을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도달하기를 꿈꾸는 미래의 모습은 이미 오랜 과거의 삶 속에 들어있었으므로 그것을 발굴해 되살려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노자'역시 우리의 '오래된 미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해설서들이 존재하고 있는 마당에 또 다시 단순하게 '노자'의 자구 해석을 반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의 노자 읽기는 오래된 노자의 가르침을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삶,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 인류가 나아갈 미래문명과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되살려내는, '오래된 미래'로 나아가는 여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 -국제.06.7/5 -
▲필자는 1960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부산대 철학과와 동대학원 졸업한 철학박사. 저서로 '둘이 아닌 세상'(이후· 2002), '불이사상으로 읽는 노자'(예문서원·2006) 등이 있다.